연필들의 인형극

by 다운

13살, 까마득히 어린 소녀는 교실 안이라는 범위를 넘어 복도를 돌아다니는 모든 또래 아이들에게 무수한 따돌림을 받았다. 조롱과 비웃음이 섞인 시선 속, 유일한 친구는 필통 속 연필들이었다. 연한 파란색에 조명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책상 위에 책을 펼치고 한 손에 연필을 쥔 채 수업을 듣다가, 지루함이 몰려오면 책상 위를 무대 삼아 연필들과 상황극 놀이를 하곤 했다.


파란 책상은 바다, 그 위에 펼쳐진 책은 무인도, 필통은 통통배, 그 안에 몸을 뉘이고 있는 연필과 볼펜은 승객들, 손에 쥐어진 연필 하나는 무인도에서 그 배를 기다리는 표류자, 지우개는 연필의 생존을 돕는 가방이자 머리를 뉠 수 있는 베개가 되었다.


수업시간마다 제 뜻과 달리 무인도에 무한 표류하게 된 연필은 네모난 고무 재질의 가방을 꽉 끌어안고 드넓은 책장 위를 한없이 걸었다. 밝은 밤이 찾아오면 그것을 베고 누워 종잇장 사이 움푹 파인 곳에서 잠을 청했고, 여전히 밝은 낮이 되면 물가로 나가 낚시로 먹을 것을 구하거나 자신을 구원할 구조선이 오지 않을까, 지평선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면 아무렇게나 펼쳐진 책이나 필기구를 내팽개친 채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아이들과 달리, 소녀는 여전히 연필과 지우개를 양손에 쥔 채 무어라 중얼거렸다. 의도적인 괴롭힘을 일삼던 남자아이들도, 남자아이들의 행위를 보며 비웃던 여자 아이들도, 소녀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끼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어느 날, 소녀의 중얼거림을 가까이서 듣던 한 남자아이는 소녀의 손 안 꼿꼿이 세워진 연필에 시선을 두었다. 마침 연필은 허기짐을 해결하기 위해 바닷가 부근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을 때였다. 뭉툭한 듯 날카로운 검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낚시를 하던 연필은 대뜸 남자아이의 손에 붙잡히고 말았다.


소녀의 손에서 벗어난 연필은 마치 심해가 만들어 낸 허리케인에 빨려 들어간 것처럼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따돌림을 당할 때에도 용기 내 맞서지 못했던 소녀는 벌떡 일어나 남자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쭉 뻗어 연필을 돌려달라고 큰소리로 말했다. 그들의 괴롭힘에도 마냥 조용하던 소녀가 악 소리를 내자, 새로운 반응에 흥미를 느낀 남자아이는 멀대같이 큰 키와 긴 팔을 쭉 뻗어 연필에 닿지 못하도록 했다. 두 사람이 만들어 낸 소란스러움에 모든 아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소녀의 얼굴은 어느새 연필과 동기화되어, 점점 잿빛으로 변해갔다. 열심히 뛰어도 보고, 긴 팔에 매달려도 보았지만 연필은 소녀의 손 안으로 들어 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때 필통이라는 배 안에서 소녀를 응원하는 다른 연필들의 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넌 혼자가 아냐, 우리가 있잖아, 넌 할 수 있어. 그 응원은 소녀에게 알 수 없는 힘을 쥐어주었다.


자리로 돌아간 소녀는 필통 안에서 새 연필을 쥐었다. 집에서 막 깎아와 모서리가 전혀 닳지 않은, 아주 날카로운 연필이었다. 소녀는 단전에서 끌어올린 힘으로 팔을 휘둘러 얄미운 남자아이의 기다란 팔에 연필을 꽂았다. 연필심이 남자아이의 팔에 아주 조금 박혀 들어갔다.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멀대같이 큰 키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고, 허리케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연필은 나무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소녀가 다급히 연필을 줍자, 연필은 살았다는 느낌에 안도한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