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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효 Jan 05. 2021

자국인과 동등한 조건으로 일하기 위해 결혼했다

끝을 말하고 시작을 말하는 게 순서 

낯선 이에 눈에는 결혼반지도, 예물도 신혼집도 없는 결혼이었지만 법적으로 엄연히 부부로 선약한 진심을 담은 인연이었다. 너무 이른 것이 아니냐며 만류하는 주변의 목소리에도 이 관계를 지켜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과 프랑스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기에 주저하면서도 밀고 나갔다. 프랑스 석사를 취득하고 몇몇 화장품 회사에서 일했지만, 계약이 끝나가는 시점에 번번이 높은 임금과 까다로운 행정 절차 때문에 계약 의사를 번복하는 고용주로부터 여러 번 상처를 받은 뒤였다. 자국민의 세금으로 외국인에게 무료 교육은 물론 주거 보조금을 주는 자비로운 사회주의 국가 프랑스는 분명 쉬이 외국인에게 취업 비자를 내어주겠거니라고 생각했던 나의 오산이었다. 대학교 석사 과정을 마치고 프랑스 회사에 취직해도 일정 수준 이상의 임금을 받지 못하거나, 전공과 무관한 일을 한다면 프랑스 경시청은 가차 없이 체류증 연장을 거부했다.  


당시 나는 한 프랑스 회사에서 해외 시장 개발을 도맡아 한국, 대만, 영국 현지 파트너와 협업하여 매장을 오픈하고 해외 시장 매출 증진을 위해 밤낮없이 일했다. 한국인이다 보니 회사에 몸 마쳐 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기에 친구들과의 약속에 3-40분 늦는 것은 기본이요, 나의 몸을 돌보지 않은 채 위염이 걸릴 정도로 일했다. 1년짜리 체류증을 갖고 있다 보니 6개월 유기계약으로 채용되어 2번의 연장이 끝나갈 때쯤, 사장은 나를 런던 도버 스트릿 마켓으로 파견을 보내며 브랜드의 팝업 스토어 매장을 둘러보라는 임무를 맡겼다. 런던으로 가는 새벽 기차 유로스타를 타고, 첫 출장에 들떠있던 나에게 사장은 정식 직원으로 채용하고 싶으나 연봉은 삭감하겠다는 메일을 보냈다. 들뜬 채로 정신없이 런던 첫 출장을 마치고 파리에 돌아와 방 안에 홀로 앉아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이 회사와 그렇게까지 일하고 싶은가. 


단순히 돈을 적게 버는 것만이 아니었다. 내 업무 능력을 인정하여 취업 비자를 마련해주면서까지 고용할 의사를 보이면서도 임금은 되려 줄이겠다는 그의 의중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주변에서는 조금 희생하여, 비자를 받을 때까지 견뎌보라는 이들도 있었으나 그렇게까지 자아를 구겨가며 일할 정도의 회사는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그에게 정식 계약을 거절한다는 메일을 보냈다. 돌이켜보면 그는 외국인이 프랑스 취업 비자를 간절히 원하는 상황을 역이용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나를 채용하려 꼼수를 부렸던 것이다.


결혼은, 계약이 끝나고 약 한 달 후에 치러졌다. 비자 만료를 하루 이틀 남긴 시점이었다. 인생이 재밌는 이유는 한 선택이 어떻게 삶을 뒤흔드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쿤데라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으므로,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를 비교할 수 있는 두 번째,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인생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했듯 당시의 고민과 걱정, 확신 또는 불안들이 뒤엉켰던 선택은 돌이켜본다 해도 옳은 결정이었는지 알 수 없다. 그 회사에 남아 있었어야 했나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을 것은 아니다. 결혼 대신 다른 선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지금의 내 삶에 만족하고 온전히 행복하다면 그까짓 인생의 잘못된 선택쯤은 그저 해프닝으로 웃어넘길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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