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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상혁 Jan 08. 2023

미국이 신미양요를 일으킨 까닭은?

신미양요

미국은 1866년 일어난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병인양요 당시 동행했던 프랑스 신부 리델을 통해 알게 된다. 하지만 와츄세트호와 셰넌도어호를 조선에 보내 사건 조사와 생존자 확인을 했을 뿐 즉각적인 대응을 하지는 않았다. 남북 전쟁 직후 군비가 축소되고 있는 상황이었고, 링컨이 암살되는 등 정치적 불안이 계속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869년 율리시스 S. 그랜트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대륙 횡단 철도가 완성되면서, 미국은 태평양 방면으로의 진출을 본격적으로 모색하게 된다. 이때 다시금 주목받은 사건이 바로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다. 이 사건을 명분으로 한반도 연안에서 조난된 미국인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조선과 교섭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된 것이다. 이에 그랜트 행정부는 조선과 조난 선박 구조 문제 등을 협상하기로 결정하고, 책임자로 주청 특명전권공사 프레드릭 로우를 선임한다. 로우 공사는 총리아문을 방문해 조선 사절단에게 미국 정부가 조선에 함대를 파견하여 교섭할 의사가 있다는 서한을 전해줄 것을 요청했다. 청 정부는 처음에는 이를 거절했지만 로우 공사의 요청이 몇 차례 계속되자 입장을 바꾼다. 어차피 서한의 전달 여부와 관계없이 미국의 함대는 조선으로 갈 것이며, 조선이 이를 모르고 있다가 미처 대비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견 때문이었다. 결국 청은 로우 공사의 서한을 예부에 넘겨 조선에 전달하게 한다. 이에 대원군은 곧바로 미국의 요구를 거절하는 답신을 보내왔는데, 로우 공사와 로저스 제독은 그 회신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조선으로의 출동을 결정한다.   


1. 미국의 동원한 병력은? 

    조선 출동에 동원된 미국의 군함은 모두 5척이었다. 기함 콜로라도(3,350톤급), 코르벳함 알래스카(2,400톤급)와 베니시아(2,400톤급), 포함 팔로스(420톤급)와 모노카시(1,370톤급)였다. 함포는 총 85문, 승무원은 1,230명에 달했다. 페리 제독이 일본에 개항을 요구할 때 동원한 흑선이 2,450톤급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매우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콜로라도호와 알래스카호를 제외하고는 모두 남북전쟁 직후에 건조된 최신예 함선이었다. 원정에 동원된 병력은 1,230여 명이고, 상륙부대는 로저스 제독의 보고서에 따르면  보병 9개 중대, 해병 1개 중대, 공병대 및 의무대 등 총 651명이었다고 한다.


2. 손돌목에서 조선이 먼저 포격을 한 이유는? 

    5월 16일 로저스 제독의 지휘하에 미국의 함대는 나가사키항을 떠나 조선으로 향했다. 19일 충청도 해미현 앞바다를 거쳐 21일 남양부 풍도에 도달했고, 26일에는 부평부 물치도 앞바다에 정박해다. 27일에는 영종 방어사와 경기 감사가, 28일에는 인천 부사가 각각 이양선의 출현을 의정부에 보고하였다. 30일에는 조선 관리가 기함 콜로라도호에 승선하여 문정을 진행한다. 이때 로우 공사는 조선 관리에게 교섭 협상을 위해 왔음을 밝히고, 조선은 자신과 직위가 대등한 특사를 파견하여 교섭에 응할 것을 요구했다. 또 대형 함정이 수도로 이동하기 위해 먼저 소함정을 강화해협으로 보내 탐측할 것임을 일방적으로 알렸다.

    6월 1일 로저스 제독은 무장 보트 4척을 보내 모노카시와 팔로스의 엄호 속에 강화 해협 일대를 측량하게 했다. 물론 이는 조선 측의 허가 없이 진행된 불법적인 측량 행위였다. 조선 입장에서 미국의 강화 해협 측량은 수도 방위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할 수 있는 사항이었기에 결코 허락할 수 없었다.  때문에 미국의 보트가 손돌목을 통과하여 북상을 시도하자 광성보, 덕포진, 초지진에서 15분여에 걸쳐 발포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조선의 노후한 무기는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고, 미국 보트는 곧바로 퇴각하였다. 


3.  미국이 6월 10일을 디데이로 정한 이유는? 

    청의 총리아문을 통해 조선에 평화적 조약 체결 의사를 미리 밝혔다고 생각한 로우 공사는 조선 측의 공격을 받게 되자 이를 중대한 사건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조약 체결이 우선이었던 로우 공사는 바로 전투를 개시하지는 않았다. 일단 율도 백사장에 꽃아 둔 장대에 묶어둔 서한을 교환하는 형태로 이 사건에 대해 조선과 협상을 시도하였다. 그는 서한을 통해 조선이 책임자를 처벌하고 교섭에 나선다면 이 사건을 더는 문제 삼지 않겠지만, 조선이 교섭에 응하지 않는다면 10일 이내로 상륙작전을 단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당연히도 조선 정부는 공식 허가 없이 강화해협에 미 함대가 진입한 것 자체가 불법 행위임을 지적하고 사과를 거부한다. 협상이 결렬되자 로저스 제독은 즉각 지휘관들을 모아 회의를 하여 6월 10일을 디데이로 정하고 상륙작전 계획을 수립한다. 


4. 강화도 공격 당시 미군의 전략은? 

    로저스 제독은 두 나라의 전력을 고려하여 22시간으로 작전 소요 시간을 정하였다. 이를 기준으로 상륙부대에게 이틀 치 식량과 탄약 100발을 지급하였다. 계획대로 10일 오전 10시 미국은 함포 공격을 개시하였고 12시 30분부터는 해군중령 킴벌리가 지휘하는 450여 명의 미군이 초지진 일대에 상륙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상륙을 지원하던 도중 조류에 밀려 팔로스호가 좌초되었고, 배에서 내린 야포도 갯벌에 빠지면서 예상보다 시간이 지체된 것이다. 결국 모노카시호의 엄호 속에 16:30분이 돼서야 미국은 상륙 작전을 마무리하고 초지진을 점령할 수 있었다. 이때 초지진을 방어하고 있던 조선군은 이미 철수한 상태였기 때문에 미군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륙 과정에서 시간이 지체됐기 때문에 더 이상 진출하지는 못하고 초지진 일대에서 숙영에 들어갔다. 

    상륙 부대의 목표는 대형함선의 진출 여건 마련을 위해 초지진에서 광성보에 이르는 해안 진지들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건이 좋지 않았다. 팔로스호가 좌초된 상황에서 포함 공격을 담당하는 모노카시호는 강화도 해안으로의 접근이 사실상 어려운 상황이었다. 작약도에 머무르고 있던 미국의 대형 함선들도 정확한 해도 없이 강화 해협으로 들어오기 어려웠다. 때문에 강화도에 상륙한 미군들은 추가 보급 없이 가지고 있던 식량과 탄약으로 작전을 마무리해야만 했다. 더욱이 상륙 작전에 시간이 지체되어 물자도 충분치 않았다. 그래서 이튿날 새벽 미군은 초지진을 파괴하고 덕진진을 향해 북상하기 시작한다. 포병과 함포가 먼저 공격을 개시하고 뒤이어 보병대가 진격하는 전형적인 전략으로, 미군은 15분 만에 덕진진을 점령하였다. 초지진 때와 마찬가지로 미군은 덕진진 역시 파괴하였다. 

    이어서 미군은 북상을 계속하여 12시경 광성보 주변에 도착하였다. 미군은 광성보 역시 다른 진지와 동일한 방법으로 공격하였다. 광성보 뒤 봉화곡 일대 언덕에 포병 부대가 대형을 펼친  후 공격을 개시하였고,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온 모노카시호도 함포 사격을 가하였다. 이후 보병 부대가 광성보로 돌격을 감행하였다. 하지만  초지진, 덕진진과 달리 광성보는 어재연이 이끄는 상당수의 조선군이 있었다. 대부분 호랑이 사냥꾼으로 구성된 조선군은 사격으로 응수하고 백병전까지 벌였지만 끝내 패배하였다. 이후 미군은 조선군의 ‘수자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게양한 후 광성보 일대의 시설물을 파괴하였다. 


5. 양측의 피해 상황은? 

    광성보 점령 당시 미군의 피해는 전사자 3명 부상자 10여 명이었다. 이때 해상에서 함포 사격을 하던 모노카시호도 조류에 휩쓸려 좌초당하면서 파손되었다. 팔로스호와 모노카시호가 모두 파손되면서 미국은 해로를 탐측할 수 있는 함선을 모두 잃게 된다. 

    광성보 전투 당시 조선의 피해는 상당했다. 우리 기록에 따르면 조선군은 광성보 전투에서 진무중군 어재연을 비롯해 50여 명이 전사하고 24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반면 미국 전체 전과보고에 따르면 조선군 사상자는 243명이었고, 바다로 뛰어들어 익사한 사람 100여 명을 포함하면 350여 명에 달하는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 어느 기록이 정확한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어느 경우이든 미군에 비해 상당한 피해를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조선군 20여 명이 부상을 입고 미군의 포로가 된다. 그동안 신미양요를 다룬 대부분의 글에서는 이 포로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다루지 않았었다. 그러던 중 tvn에서 방영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포로 문제에 관한 조선의 결정을 소재로 다루면서 이 내용이 널리 알려졌었다. 드라마의 내용은 어느 정도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였다. 실제 광성보 전투 이후 미국은 포로 석방을 조건으로 조선과의 교섭을 시도했었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드라마 대사 중에 ‘조선이 너희를 버렸다’라고 표현한 것은 이 부분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결국 미군이 철수하면서 포로들은 조건 없이 석방된다. 하지만 그들에게 외적과 싸우다 포로가 된 자신들을 보살피지 않은 ‘나라’는 과연 어떠한 존재였을지 가늠하기 쉽지 않다. 신미양요의 포로 문제는 국가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국가의 의무는 무엇인지 우리 모두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6. 미군이 강화도에서 철수한 이유는? 

    애초 미국은 강화도 점령을 유지할 계획이 없었다. 그들의 최종 목적은 조선과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지 조선과의 전면전이 아니었다. 로우 공사와 로저스 제독은 무력을 과시해 일본을 개항시킨 페리 제독의 사례를 따라, 교섭이 여의치 않을 경우 미국이 무력시위를 하면 조선이 교섭에 나설 나설 것이라 판단했었다. 때문에 애초 22시간 내에 보트에 사격을 가한 조선의 해안 포대를 파괴하고 돌아오는 단기전을 계획하고 이에 맞춰 준비를 한 것이다. 상륙 작전을 총 지휘했던 블레이크 중령 역시 계획에 따라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등을 점령, 파괴한 이후 계획을 달성했다고 판단하여 복귀했다. 

    작약도 일대에 머물고 있던 미군 함대는 이후 별다른 군사 행동은 보이지 않는다. 실제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팔로스호와 모나카시호가 파손되어 더 이상의 강화 해협 탐측은 불가능했다. 이 상황에서 배수량이 큰 작약도 인근의 함선들이 강화 해협으로 들어가는 것은 매우 위험했다. 그렇다고 다시 부대를 상륙시키기도 어려웠다. 그들을 지원할 수 있는 포함이 없었고 주요 거점에 조선군의 방비가 계속 강화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남은 미군 함대는 장대에 매단 서신으로 조선과 교섭을 지속할 뿐 별다른 군사 행동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교섭에 관한 조선의 입장은 완강했고, 결국 미군은 조선 정부와 조약 체결을 하지 못하고 7월 3일 즈푸항으로 철수한다.


※ 참고 문헌

•「신미양요와 청의 조선」 정책

•『흥선대원군 평전』, 김종학, 2021

•『신미양요』, 신효승, 2021

•『근대 조선과 세계』, 최덕수,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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