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왕후의 등장
흔히 하는 오해 중 하나가 흥선대원군이 성인이 된 고종의 친정 선포로 자연스럽게 물러났다는 것이다. 물론 틀린 설명은 아니다. 하지만 정치는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10여 년 동안 최정점에서 권력을 행사했던 인물이 말 한마디로 모든 권력을 잃을 만큼 조선은 단순한 국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고종의 친정 선포 이전 이루어졌던 고종 중심의 정치 질서 재편이 대원군의 하야로 이어졌다는 설명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성인이 된 고종은 여흥 민 씨 세력과 결탁하며 지지 기반을 넓혀갔고, 이들을 중심으로 반대원군 세력이 결집하면서 고종은 대원군과 맞설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 여기에 철렴 선언 이후 대원군과 멀어졌던 조대비의 지지는 고종의 친정 선언에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효’에 기반하고 있는 고종과 대원군의 관계는 성리학 국가인 조선에서 대원군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기반이었다. 하지만 조대비의 지지는 고종이 ‘효’에 기반한 대원군과의 관계를 끊고 친정 선언을 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였다. 이렇듯 어느 정도 여건이 마련되자 1873년 고종은 친정 선언을 하였고, 이는 곧바로 대원군의 하야로 이어졌다. 이때는 이미 집권층 내의 대원군 세력은 힘이 약화되었기에 대원군은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1. 여흥 민 씨 세력이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고종 재위 기간 여흥 민 씨 세력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명성왕후의 외가이기 때문이었다. 여흥 민 씨 민치록의 여식인 명성왕후는 다른 형제들이 모두 일찍 죽으면서 무남독녀로 자라났다. 아버지 민치록도 1858년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양자로 들어온 오라버니 민승호를 제외하고는 가까운 친인척은 없었다. 오히려 부대부인 민 씨(대원군의 부인)와 12촌 지간으로 자주 운현궁을 드나들었기 때문에 정서상 대원군 집안과 가까운 편이었다. 양오라버니 민승호 역시 원래는 대원군의 장인인 민치구의 아들로 대원군에게는 처남이었었다. 고종의 혼례를 추진하던 대원군 입장에서 아버지와 형제도 없고 자신의 집안과 가까운 명성왕후는 완벽한 왕비감이었을 것이다. 결국 대원군의 낙점을 받은 명성왕후는 16세의 나이로 고종과 가례를 올린다. 이 가례는 후일 명성왕후의 외가인 여흥 민 씨 세력이 정계에 등장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준다. 친정을 준비하던 고종이 명성왕후의 외가인 여흥 민 씨 세력을 자신의 지지 기반으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실제 고종은 친정 이전인 1870년부터 여흥 민 씨를 본격적으로 등용하였다. 1870년에 민승호를 시작으로 1871년에는 민규호를 도승지로 임명한다. 도승지는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의 최고위 관직으로 국왕을 가까이서 보살필 수 있는 주요 관직이었다. 이외에도 민승호, 민겸호, 민영위, 민영목 등이 주요 관직에 등용되는 등 여흥 민 씨의 정계 진출이 두드러진다.
2. 대원군과 명성왕후의 관계가 틀어진 이유는?
대원군은 처음에는 명성왕후를 매우 아꼈고 명성왕후 역시 시아버지인 대원군을 잘 따랐다고 한다. 이러한 고종과 명성왕후가 틀어지게 된 것은 후사 문제 때문이었다. 왕권의 안정에는 왕자의 생산이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 하지만 명성왕후는 혼례 이후 한동안 왕자를 출생하지 못하였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혼례 초기 고종과 명성왕후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기다리던 소식은 명성왕후가 아닌 후궁 귀인 이 씨에게서 먼저 들려왔다. 그녀가 왕실에서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완화군 이선)을 출산한 것이다. 헌종 이래 41년 만에 태어난 왕족 종가의 남자아이였다. 그런 손주였기에 당연히도 대원군은 완화군을 매우 아꼈다고 한다. 심지어 서장자인 완화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만약 완화군이 세자로 책봉된다면 명성왕후의 입지는 약화될 것이 분명했기에, 명성왕후의 불안감과 대원군을 향한 불만은 높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이 계속되지는 않았다. 1870년 드디어 명성왕후가 임신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후궁이 아닌 중전의 임신이었기에 조정에서는 산실청을 설치하는 등 각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명성왕후가 유산하면서 모든 준비는 수포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후에도 명성왕후의 노력은 계속되어 1871년 드디어 기다리던 첫 왕자를 낳게 된다. 일련의 아픔을 겪었던 명성왕후에게는 너무나도 귀한 아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 귀한 아들이 항문이 막힌 쇄항증으로 겨우 5일 만에 죽고 말았던 것이다. 일설에는 명성왕후가 왕자의 죽음이 대원군이 보낸 산삼 때문이라고 여겼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공식 기록은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종의 친정 선포 이전 이미 세자 자리를 놓고 대원군과 명성왕후의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 상황에서 고종이 여흥 민 씨 세력과 연대하여 자신의 뜻을 거스르자, 대원군은 그 원인을 명성왕후와 그 일가에게 돌렸을 것이다. 명성왕후 입장에서도 절대 대원군을 용서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한다. 흥선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난 이듬해에 민 씨 세력의 핵심 인물인 민승호가 집에 배달된 폭발물로 인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 배후로 지목된 인물이 바로 대원군이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경복궁에 불이 나는데 발화 지점이 명성왕후가 있는 교태전 주변이었다. 이 역시도 당시 사람들은 대원군의 소행으로 보았다. 일련의 사태 속에서 명성왕후와 대원군은 이제는 함께 할 수 없는 사이가 되었던 것이다.
3. 고종의 친정 의지는?
1863년 12세의 나이에 즉위한 고종은 1870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친정의 의지를 보인다. 1872년에 고종과 동지사(청에 다녀온 사절)와의 대화에서 고종은 자신의 의지를 드러낸다. 대화 도중 고종이 어린 동치제(청 황제)를 대신해 섭정을 하고 있던 공친왕을 비난하고 동치제의 친정을 바라는 중국의 민심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고종이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동치제를 빗대어 본인의 친정 의지를 내비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종이 더욱 강하게 자신의 의지를 드러낸 것은, 그가 내린 성문 통과세 폐지에 관한 명령이었다. 1873년 10월 17일(양력) 고종은 어전회의에서 성문 통과세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단순히 조세 수취의 문제가 아니었다. 경복궁 중건 당시 신설된 문세는 대원군의 운현궁이 징수하고 사용하는 자금이었다. 여기에 문제를 제기한 것은 대원군 통치 체제에 대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대원군을 향한 무신들의 충성심이 높았기에 각 군영의 장신들은 고종의 문제 제기를 받고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결국 고종은 대원군 계열인 네 영의 장신들을 심문케 하고 모든 도성의 문세를 철폐하는 조치를 취한다. 이는 고종이 대원군을 대신해 각 군영을 직접 통제하기 위한 시도로 스스로 친정의 의지가 있음을 어느 때보다 분명히 밝힌 것이었다. 이때 고종의 나이 22세였다.
1873년에 들어 고종의 친정을 위한 대부분의 준비는 마무리된다. 고종을 뒷받침할 수 있는 새로운 세력이 만들어졌고 반대원군 세력이 결집하였다. 여기에 더해 고종 역시 자신의 친정 의지를 꾸준히 드러내며 존재감을 키워갔다. 반면 대원군 세력은 나날이 약화되어 갔다. 조대비와는 병인양요를 전후하여 이미 관계가 멀어졌고, 한때는 협력 관계였지만 대원군의 독단적인 행태에 불만을 품은 안동 김 씨 세력도 그와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다. 이제는 궁 내에서 대원군을 지켜줄 세력이 마땅치 않게 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 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고 고종의 친정을 바라는 상소가 올라온다. 바로 최익현의 상소였다. 고종과 최익현이 사전에 교감한 것은 아니었지만, 고종은 이 상소를 기회 삼아 자신의 친정을 선포한다. 친정 선포에 대한 조대비의 지지가 있었기에 대원군은 이를 반박할 명분도 없었다. 이미 궁 내 기반도 약해진 대원군은 결국 별다른 반발도 하지 못하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 참고 문헌
ㆍ『흥선대원군 평전』, 김종학, 2021
ㆍ『한국 사람 만들기 1』, 함재봉, 2020
ㆍ『대한제국의 패망과 그림자』, 기무라 간,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