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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상혁 Jan 29. 2023

최익현의 상소로 흥선대원군이 쫓겨나다.

1870년대 이르러 고종이 친정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는 상황에서 고종을 지지하는 반대원군 세력이 결집하기 시작한다.  반면 대원군의 독단적인 정치 행위는 점차 대원군 세력을 고립시켰다. 집권 세력 교체를 위한 어느 정도의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직 대원군의 권세가 강했기에 그 누구도 고종 친정과 대원군 하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못하였다. 이 상황을 타개한 인물이 바로 면암 최익현이다. 최익현이 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린 것이다. 평소 같으면 대원군 세력에 의해 차단되었을 상소문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결국 고종에게까지 전달되었다. 이후 고종이 최익현의 상소를 받아들이고 친정 선포를 하면서 10여 년에 걸친 대원군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결과적으로 최익현의 상소가 대원군 하야에 있어 트리거 역할을 한 것이다.   


1. 최익현이 대원군에 대해 부정적 생각을 가지게 된 이유는? 

    최익현이 대원군 정권에 부정적이었던 이유는 스승 이항로의 영향이 크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대원군은 민심 결집을 위해 당대 명유인 이항로에게 동부승지직을 내린다. 이에 이항로는 서울로 올라와 사직 의사를 밝히며, 사직이 윤허될 때까지 외세를 배척하자는 내용이 담긴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렸다. 조정에서는 다시 그에게 공조 참판직을 제수했지만 여전히 그는 관직을 사양하였고, 오려 그는 경복궁 중건 중지와 만동묘 재건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리며 대원군을 비판하였다. 결과적으로 이항로는 대원군에 의해 배척당하지만 그 뜻은 제자 최익현을 통해 계승된다. 

    1868년 36세의 최익현은 ‘토목의 역을 중지(경복궁 중건 등)하고 취렴의 정(원납전 징수)을 파하며, 당백전을 철폐하고 문세의 봉납을 금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다. 최익현이 비판한 내용은 모두 대원군이 주도하는 정책으로 이는 대원군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당연히도 대원군 측의 반발이 이어졌다. 사간 권종록이 최익현의 유배를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변수가 발생한다. 고종이 최익현을 보호한 것이다. 고종은 최익현에게 유배 대신 삭직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형벌을 내렸고, 며칠 뒤에는 특지를 내려 최익현을 정3품 통정대부로 올리고 돈령부도정에 제수하였다. 최익현은 다시 상소를 올려 이를 사양하고 낙향하지만, 친정을 준비하던 고종은 최익현을 주목하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한다.


2. 최익현의 상소가 불러온 결과는? 

    1870년에 고종은  최익현에게 동부승지직을 제수했지만 그는 부임 후 곧 물러났다. 1872년에는 다시 돈녕부도정직을 제수 했지만 이마저도 사양하였다. 하지만 1873년은 달랐다. 고종이 예전 최익현이 주장했던 내용 중 하나인 사대문 통행세를 폐지하고 최익현을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하자, 그는 조정에 나오는 대신 상소를 올려 대원군의 실정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인륜이 무너져 사라졌다’라는 과격한 표현이 담긴 상소문이었다. 

    이 상소문은 포천현에서 경기감영으로 올라왔지만 경기감사 김재현은 이를 보고하지 않고 몰래 대원군에게 알린다. 이후 김재현이 대원군의 명에 따라 상소를 다시 포천현으로 환송하면서 사태가 일단락 되는 듯 했다. 하지만 사태는 이대로 끝나지 않았다. 최익현이 출사하지 않자 고종이 여러 차례 승정원 하례를 보내 그 이유를 물은 것이다. 이에 최익현은 양주로 나가 원래의 상소 그대로 다시 제출했고, 이번에는 고종에게까지 전달된다. 

    상소를 받은 고종은 상소의 내용이 가상하다고 칭찬하며 최익현을 호조참판에 임명하였다. 당연히도 대원군 세력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좌의정 강로와 우의정 한계원을 필두로 다수의 시원임대신들이 사직을 청하였고, 이와 함께 최익현을 비난하는 상소가 빗발친 것이다. 하지만 고종은 단호했다. 최익현 상소에 맞서 스스로 탄핵을 자행했던 승지, 성균관, 사헌부, 사간원의 관리를 파면하고, 최익현의 상소를 강력하게 비난한 안기영과 허원식을 유배 보낸다. 또한 성균관에서 집단휴학을 주도한 유생들 역시 귀양 보내 버린다.     

    이 상황에서 최익현은 다시 한번 상소를 올린다. 이 상소에는 대원군의 실정에 대한 비판과 함께 친친의 반열에 있는 자(대원군)가 국정에 간여치 못하게 하라는 과격한 주장이 담겨 있었다. 이 상소를 계기로 고종과 민씨 세력은 친정 선포를 준비한다. 상소가 올라온 다음날인 12월 23일(양력) 고종은 서무친재를 선언하고 이를 조보로 반포할 것을 명한다. 하지만 형식상 1866년 조대비의 철렴 선언 이후 고종의 친정이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고종의 서무친재 선언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날 다시 명을 철회하였지만, 실질적으로 이때부터 대원군의 섭정은 중단되고 고종의 친정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대원군이 중용한 좌의정 강로와 우의정 한계원을 사직시키고, 영의정에 이유원을 우의정에 박규수를 임명한다. 박규수는 조대비와 가까운 인물로 한때 고종의 스승이었다. 고종은 자신과 가까운 박규수를 우의정에 임명하며 자신의 친정 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한편 최익현의 경우 상황이 좋지 않았다. 두번째 상소가 너무 과격했기에 고종도 더이상 그를 보호하기 어려웠다. 결국 최익현은 의금부에 수감되어 국청을 받게 된다. 하지만 고종이 최익현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국청은 어영부영 진행되었고, 고종은 조대비의 분부를 명분으로 최익현에게 가벼운 형을 내리게 했다. 당연히 많은 신하들이 이에 반발했지만 고종은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항의하는 신하들을 모두 파직시키는 등 최익현을 적극적으로 보호하였다. 결국 최익현은 제주도에 위리안치되는 정도의 형식적은 처벌을 받았고 그마저도 1년 반 만에 풀리게 된다.


3. 대원군 실각 이후 정치 변화는?     

    대원군이 물러난지 한달여 만에 경복궁에 화재가 발생해 자경전이 모두 불타는 사건이 발생했다. 방화의 배후로 대원군이 의심되었지만 증거는 없었다. 이 사건은 부사과 박우현이 경복궁이 화재가 고종의 불효 때문이라고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대원군 복귀의 단초를 마련하였지만, 박우현이 흑산도로 유배되면서 일단락되었다.     

    고종은 친정 선언 이후 대원군 시기 시행된 정책에 대해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고종의 주도 아래 청전 폐지, 무위소의 신설과 강화 진무영의 폐지, 만동묘 복설 등이 이루어졌다. 청전의 경우 대원군 세력의 주요 정치자금이었기 때문에 이를 폐지한 것은 대원군 견제를 위함이었다. 하지만 당시 국가에서 보유한 청전의 양도 막대하였기에 청전 폐지로 인한 국가 재정의 위축과 경제적 혼란은 피할 수 없었다. 강화 진무영의 폐지는 군영 내의 대원군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대원군은 집권 기간 동안 무신들을 중용해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삼았었다. 때문에 군영 내에는 친대원군 세력이 다수 존재하였다. 그래서 고종은 대원군이 심혈을 기울여 키워냈던 강화 진무영을 폐지하고 친위 부대인 무위소를 새롭게 신설함으로써 군대 장악력을 높이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도 문제를 초래하였다. 대안 없는 강화 진무영의 폐지는 강화 방면의 방비 약화를 불러왔고, 이는 1875년 운요호 사건 당시 우리가 속절 없이 당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     

    한편 섭정에서 물러난 이후 대원군은 북문 밖 삼계동 별장(석파정)에 머물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강화진무영 폐지 소식이 들리자 그는 궁궐에 들어가 강화진무영 폐지의 부당함을 극언하였다. 하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도성을 나온 대원군은 남연군의 묘를 참배한 후 양주의 곧은골(직골)로 들어가 은거를 시작한다. 이 와중에 신원미상의 인물이 두고 간 폭발물로 인해 고종 친정의 핵심 인물인 민승호와 그의 아들 및 명성왕후의 생모 한창부부인 이씨가 폭사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사람들은 이번에도 대원군을 의심했지만 여전히 명확한 증거는 없었다.     

    대원군이 곧은골에 은거하자 그를 다시 모셔오라는 상소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고종은 가장 먼저 상소를 올려 상소운동의 단초를 마련한 이휘림을 고금도로 유배보내 사건을 일단락 지으려 했지만, 이후에도 대원군의 봉환을 요청하는 상소는 계속되었다. 이때 앞장섰던 세력이 영남지방의 남인 유생들이었다. 이들은 서울로 상경하여 3차례나 복합  상소를 할 만큼 적극적이었다. 고종은 다시 복합 상소를 할 경우 극률로 다스릴 것이라 경고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1875년 7월 4도의 유생들이 복합 상소를  하자 고종은 그 주도 세력을 참형에 처하라는 명을 내린다. 상황을 지켜보던 대원군은 자신으로 인해 유생들이 대거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자, 결국 대왕대비의 교지에 따라 스스로 운형궁으로 복귀하면서 상소 운동은 끝이 난다.


4. 영남 지방의 유생들이 대원군 봉환에 적극적으로 나선 이유는?     

    일반적으로 원납전 징수, 서원 철폐, 묘지림 벌목 등으로 인해 대원군과 유생들의 관계가 껄끄러웠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대원군이 물러나 곧은골에 칩거한 이후 가장 적극적으로 대원군의 봉환을 요구한 세력은 영남 지방의 유생들이었다. 왜 그랬을까? 의외로 그 답은 간단하다. 대원군과 영남 지방 유생들의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영남 지방의 유생 특히 남인 계열들은 인조반정과 갑술환국을 거치며 중앙 정계에서 소외되었었다. 대략 200여 년에 걸친 긴 시간이었다. 노론 계열이 주도하는 정국에 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틈은 없었다. 대원군 역시 자신의 지지 기반이 미약하였기에 오랜 기간 소외되었던 영남 지방의 남인 계열들을 주목하고 섭정 이전부터 이들과 교유하였다.     

    대원군은 섭정 시기 영남 남인 계열의 유후조를 우의정에 임명하고 집권 기간 동안 중용하였다. 유후조는 남인의 대표격인 유성룡의 후손이었다. 이외에도 이 지역 출신의 인사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때문에 영남 지방 유생들은 대원군에 우호적일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서원 철폐 당시 잠시 관계가 소원해지기는 했어도, 서원 철폐에 반대해 영남 지방에서 올린 단 한 차례의 만인소에는 대원군의 시정에 관한 비판은 없었다. 또한 만인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상소를 올리지 않았고 대원군 역시 이들에 대해 별다른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배려한 것이다. 때문에 대원군이 하야하자 영남 지방 특히 남인 계열의 유생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대원군 봉환에 나선 것이다.



    이로써 조선에서 대원군 시대가 끝나고 고종과 명성왕후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 하지만 이후에도 대원군은 주요 사건마다 꾸준히 이름을 올린다. 임오군란, 갑오개혁, 을미사변 등 굵직한 사건에 다시 등장하여 고종과 긴장 관계를 만들어 나간 것이다. 이때마다 일본과 청은 둘의 관계를 적극 이용하여 자신의 입지를 넓혀 나갔다. 권력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아버지와 자립하고 싶어하는 아들, 이 둘 사이의 관계가 한 집안 내의 이야기였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아들이 왕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급변하는 내외의 정세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 대원군과 왕의 균열은 외세가 개입할 수 있는 빈틈이 되어 결국 조선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외부의 위기가 다가오면 내부의 세력은 힘을 모은다고 한다. 하지만 이 시기 조선은 그러지 못하였다. 대원군과 고종의 대립은 외세가 조선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다. 변화하는 정세에 대응하는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진 것이다. 그 결과는 모두 알고 있듯이 조선의 식민지화였다.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부분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결과를 모두 대원군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다. 오랜 세도 정치와 굳건했던 기득권층에 맞서 중인, 무신, 영남 유생 등 기존에 주목받지 못한 세력들을 규합해 자신의 기반을 만들어 낸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었다. 또한 안동 김씨 등 기득권층을 상황에 따라 억압하고 달래가며 자신과 함께하도록 한 것은 그의 뛰어난 정치력 때문일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러한 대원군의 경륜과 정치력이 급작스러운 정세 변화 속에서 고종과 단절되었다는 점이다. 고종 친정 직후 나타난 여러 사회 혼란은 아직 정치인으로서 또 국왕으로서 미숙했던 고종의 모습을 보여준다. 만약 자연스러운 세대 교체 속에서 친정을 시작한 고종에게 조언자로서 대원군이 역할을 했다면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물론 이를 위해서는 대원군 스스로 권력을 내려 놓아야 했기에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 참고 문헌            

ㆍ『흥선대원군 평전』, 김종학, 2021       

ㆍ『한국 사람 만들기 1』, 함재봉, 2020       

ㆍ『대한제국의 패망과 그림자』, 기무라 간,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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