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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상혁 Feb 03. 2023

일본에서 한반도 정벌 논의가 시작되다 - 정한론의 등장

대체로 조선 즉 소방(小邦)으로 하여금 우리 상국을 하잘 것 없이 보고 모욕(軽侮)하여 수차례 우리의 사절을 능욕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국서를 거절하고 그 거만함과 무례함도 역시 이미 정도가 심하다고 하니 ……(중략)…… 단연코 군대를 일으켜서 죄를 물을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에게 신임하여, 그 성공을 재촉함으로써, 우리 천황 폐하의 높은 명예, 그리고 행복과 이익(尊栄福祉)을 장대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위 자료는 1875년 시마다 신이치로 등이 정부에 제출한 건백서이다. 이 건백서에는 조선 정벌에 관한 내용(정한론)이 담겨 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정부가 수립된 이후 끊임없이 한반도 정벌에 관한 주장이 제기된다. 특히 일본 내의 급격한 정치적 대립이 발생하거나 내부 불만이 고조될 때마다 같은 주장이 이어져왔다. 운요호 사건과 그 결과 체결된 강화도 조약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운요호 사건은 결코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일본의 정치적 변동 속에서 일어난 계획적인 사건이었다. 그렇기에 근대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우리뿐 아니라 일본의 역사를 함께 주목할 필요가 있다.


1. 정한론이 등장한 배경은? 

    급변하는 대내외 정세 속에서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이 단행되어 700여 년에 가까운 쇼군(막부)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 체제가 구축된 것이다. 때문에 메이지 정부는 이 사실을 주변국에 알리고 천황의 이름으로 새롭게 외교 관계를 구축해야 했다. 이때 문제가 된 국가가 조선이었다. 그동안 조선과 일본 사이의 외교 문서 전달이나 교역 등은 쓰시마번을 통해 이루어졌었고, 그때마다 쓰시마번은 조선이 내어준 도장을 사용했었다. 이는 조선 국왕과 일본 천황의 격이 맞지 않기에 만들어낸 고육지책이었다. 

     메이지 정부 역시 천황 정권의 성립과 새로운 외교 관계의 구축을 알리는 서계를 쓰시마번을 통해 조선에 보냈다. 비록 쓰시마를 통해 외교 문서(서계)를 보내는 형식은 같았지만 서계의 내용은 이전과 달랐다. 서계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황실’, ‘봉칙’ 등 기존에 사용하지 않았던 용어들이 담겨 있었으며 조선이 내어준 도장도 찍혀있지 않았다. 이에 조선 정부는 서계의 접수를 거부하였다. 이후 한동안 서계 문제는 소강상태를 맞이한다. 그러던 중 1870년 메이지 정부가 쓰시마번을 거치지 않고 외무성출사 사다 하쿠보와 외무소록 모리야마 시게루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그들은 조선의 왜학훈도 안동준과 교섭을 진행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기존의 관례를 벗어난 서계는 접수할 수 없다는 조선의 의지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자 이들은 귀국 후 제출한 복명서에 무력을 동원한 조선 정벌을 주장한다. 이른바 정한론이 시작된 것이다.


2. 정한론이 좌절된 까닭은? 

    정한론이 좌절된 까닭은 일본 정치 세력 내부의 대립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한때 사쓰마번과 조슈번은 삿초 동맹을 체결하여 함께 에도 막부에 대항했었다. 하지만 에도 막부 타도 이후 이들의 행보는 달라졌다. 사쓰마번의 인물들이 대외 진출을 모색한 반면, 조슈번의 인물들은 일본의 근대화를 주요 과제로 삼았다. 사절단을 꾸려 2년여에 걸쳐 미국과 유럽 등을 시찰한(이와쿠라 사절단, 1871~1873) 인물들도 대부분 조슈번의 사람들이었다. 

    이와쿠라 사절단이 떠난 상황에서 국내 정치는 사이고 다카모리를 비롯한 사쓰마번의 인물들이 담당하였다. 이에 불안을 느낀 조슈번 세력은 떠나기 전에 사쓰마번 세력으로부터 자신들이 귀국하기 전까지 중요한 일은 결정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하지만 상황은 이들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1873년 사이고 다카모리가 직접 사절단을 이끌고 조선에 가서 교섭을 시도하겠다고 정부에 제안한 것이다. 만약 교섭이 결렬되고 자신이 살해당하면, 이를 조선 침략의 명분으로 삼으라고 하였다. 천황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순방 중인 사절단이 귀국한 후에 실행할 것을 조건으로 덧붙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이와쿠라 사절단은 귀국을 서둘렀다. 만약 사이고의 의견대로 될 경우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질 것이 분명하였다. 귀국 후 이와쿠라  등은 한반도 정벌은 시기상조이고 지금은 내치를 우선해야 한다는 논리로  사이고의 주장을 반대하였다. 결국 일본 정부가 이와쿠라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정한 논쟁은 한동안 중단되었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이와쿠라가 등 조슈번 세력이 내세운 논리이다. 이들은 한반도 진출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시기상 빠르다는 것이었다. 즉 이들 역시도 언제든 한반도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느 세력이 승리하였든 일본의 조선 진출은 시간문제에 불과하였다.


3. 정한론 좌절 이후 나타난 일본의 정치 변화는?

    정한론이 좌절된 이후 사이고 다카모리와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이 참의직을 사퇴하였고 사이고의 근위 장교 1백 명도 사직했다(메이지 6년의 정변). 사직했던 참의들은 이타가키를 중심으로 애국공당을 조직하고 자유민권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태정관에 민선의원설립 건백서를 제출하여 민선 의원의 설립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이타가키는 건백서 기각 이후에도 여전히 자유 민권 운동을 전개해 갔지만, 그와 함께 했던 에토 신페이는 달랐다. 그는 조선의 무례를 심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불평 사족(예전 무사 계급)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사가의 난). 난은 곧 진압되었지만 메이지 정부는 이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정한론자들의 불만을 국외로 돌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때마침 류큐인들이타이완에서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메이지 정부는 이를 명분으로 타이완을 침공하였다(1874.05.02.) 사가의 난이 진압되고 두 달여 만이었다. 이는 메이지 정부의 대외 진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875년 일본은 러시아와 ‘사할린-쿠릴 열도 교환 조약(가라후토-지시마 교환 조약)을 체결하였고, 곧이어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정한론을 실행하였다.

    한편 사이고 다카모리의 경우에는 이타가키와 행동을 같이하지는 않았다. 사이고는 고향인 가고시마로 돌아가 학교를 세우고 무사를 양성하였다. 군사력을 키워 주변국 침략을 위한 목적이었다. 1876년 무사들에게 지급되던 녹봉이 폐지되고 칼의 휴대를 금지하는 폐도령이 내려지자 불만을 품은 옛 무사 계급들이 사이고를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그의 학교는 한때 학생 수가 2만여 명에 달할 정도로 융성하였다.

    메이지 신정부는 사이고의 학교를 위협 세력으로 생각하고 정찰대를 파견해 가고시마에 있는 탄약의 반출을 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이고에 대한 암살 계획마저 드러나자 이에 격분한 그의 학생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사이고를 추대하였다. 이로써 1877년 2월 세이난 전쟁(서남 전쟁)이 시작되었다.  6개 여월에 걸친 전투 끝에 결국 신정부군이 승리하였고 사이고는 끝내 할복하였다.



※ 출처

ㆍ「정한 관련 건백서를 통해 본 명치 초기 대외정책의 공론 형성」, 배한철, 2015

ㆍ『조일 수호 조규 근대의 의미를 묻다』, 한일관계연구소, 2017

ㆍ『시민의 한국사2』, 한국사연구회, 2022

ㆍ『근대 조선과 세계』, 최덕수, 2021

ㆍ『대한제국의 패망과 그림자』,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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