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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ime Weaver Apr 21. 2023

청, 조선에 일본의 침략을 경고하는 비밀 자문을 보내다

"지금 그 나라 경황을 탐지하지 민재상(병조판서 민승호)이 횡사하고 대원군이 입성하여 양당이 자못 알력의 형세이다. (중략) 지금 그들이 내홍 중이고 쇄양당이 아직 그 세력을 이루지 못한 틈을 타면 힘을 많이 들이지 않고 일을 이루기 쉽다. 우리 군함 1,2 처음 파견하여 대마도와 그 나라 사이를 오가며 은근히 해로를 측량하면서 저들로 하여금 우리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추측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우리 이사관의 교섭이 늦어지는 것을 독촉하는 모양을 보이고 교섭 진행을 압박하면 안팎의 도움으로 인해 교섭을 빠르게 마무리할 수 있고, 조약을 체결할 때에도 얼마의 권리를 얻을 수 있음은 필연의 기세이다."




1.  청나라가 조선에 비밀 자문을 전한 이유는? 


     고종은 최익현의 탄핵 상소를 계기로 1873년 11월 5일(양력 기준) 친정을 단행하였다. 친정을 선언한 고종은 대원군 계열의 동래부사 정현덕을 박제관으로 교체하는 한편, 박정양을 영남좌도 암행어사로 파견하여 동래부 왜관의 동태와 일본의 동향을 파악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변화 속에 1874년 8월 7일 베이징에서 비밀 자문이 도착하였다. 자문의 첫 번째 내용은 일본이 타이완 침공 이후 5천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조선을 침공하려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내용은 프랑스와 미국이 청에 조선과의 통상을 요구한 사실을 알려 주면서, 일본을 고립시키기 위해 조선이 프랑스, 미국과 통상 조약을 체결할 필요가 있다는 청의 권유였다.

     이후 열린 차대 자리에서 우의정 박규수는 서계 문제 당시 제기되었던 여러  문제점들을 조목조목 반박하였고, 일본과의 교섭이 필요함을 주장하였다. 청의 비밀 자문과 박규수의 주장으로 결국 조선 정부는 일본과의 교섭을 결정하고, 왜학훈도 현석운을 왜관으로 내려보냈다. 

     때마침 일본에서도 조선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외무성 관리인 모리야마 시게루를 왜관에 파견한 상황이었다. 부산에 도착한 현석운은 동래부사 박제관과 함께 9월 4일부터 모리야마와 국교 재개와 관련한 협상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동래부사 박제관과 모리야마는 일본 외무경이 예조판서에게, 외무대승이 예조참판에게 보내는 서계를 다시 작성하고, 이 서계를 특별히 정한 간사가 지니고 동래부에 가서 의논하여 정하기로 결론을 내린다.



2. 일본이 서양복 착용을 강하게 주장한 이유는?

     이후 모리야마는 협상에 따라 서계의 작성을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타이완 침략을 마무리한 뒤 조선에 사절을 파견하기로 방침을 정했기 때문에, 모리야마는 협상이 끝나고 5개월이 지난 2월 24일에야 새로 작성한 서계를 지니고 조선에 돌아올 수 있었다. 

     새 서계에는 약속대로  ‘천자’라는 글자는 없었다. 대신 ‘대일본’과 ‘황상’ 등 조선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표현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조선이 이 서계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고종은 오히려 ‘천자’ 표현이 빠진 것을 높이 평가하고 사절단에게 연향을 베풀고 협상할 것을 지시하였다.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고종이 적극적이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문제가 생겼다. 연향에서 입을 의복에 대해 양측이 서로 다른 의견을 낸 것이다. 일본은 1872년부터 문관 대례복과 통상예복을 공식적으로 제정하고, 모든 의례 절차를 서양식으로 변경했기에 당연히도 연향 의식에 참여하는 사절단은 서양복을 착용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조선은 서양인들이 섞여 들어올 수 있다는 점을 내세워 이를 반대하였다.  하지만 이는 일본이 타협할 수 없는 지점이었다.

    얼핏 보면 간단한 복장 문제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당시 일본 내 보수 세력이 예복의 복구를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조선의 요구대로 사절단이 서양복을 착용하지 않는다면 일본 내 보수 세력에게 빌미를 제공할 수 있었다. 결국 일본 사절단은 결코 조선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교섭이 난항을 겪자 모리야마는 부관인 히로쓰 히로노부와 수행원 오쿠 기세이를 도쿄에 보내 군함 파견을 요청하였다. 조선 정부를 압박하기 위해서는 군함 파견이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내치의 우선을 표방한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이를 반대하였지만, 산조 사네토미 태정대신은 이를 무시하고 결국 군함 파견을 승인하였다.



3. 일본이 조선에서 미국의 포함외교를 재현하다. 

    5월 25일 운요호가, 6월 12일에는 다이니테이보호가 부산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포격 연습이라는 명분으로 포를 발사하면서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예전 미국이 일본에 행한 포함외교를 고스란히 조선에 적용한 것이었다. 심지어 운요호는 동해안 해로 연구라는 명분으로 동해안을 측량하였고, 영흥만과 영일만 일대에 상륙하여 조선군의 무기 상황까지 확인하였다.

    한편 조선에서는 운요호를 이용한 무력시위가 역효과를 초래하였다. 운요호의 시위 직후 서계를 수용하면 군사적 협박에 굴복하는 인상을 줄 것이고, 이렇게 되면 이후에도 협박이 있을 때마다 매번 양보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된 것이다. 때문에 1875년 6월 13일 서계의 접수 여부를 논의하기 위해 열린 어전 회의에서 이유원 등 18명은 서계 수용에 중간적 입장을 취하거나 의견을 개진하지 않았다. 결국 모리야마가 가져온 새 서계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교섭의 결렬을 확인한 이노우에 요시카 운요호 함장은 이후의 행보를 논의하기 위해 7월 1일 나가사키로 귀항하였다. 귀항 후 그는 이토 스케마로 해군 소장에게 일본의 웅비하기 위한 사다리로 삼기 위해 조선을 차지해야 한다고 건의한다.


출처   

『근대 조선과 세계』, 최덕수, 2021

『조일수호조규 근대의 의미를 묻다』, 한일관계연구소편, 2017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 김흥수,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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