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도달한 결론은 일본은 의도적으로, 그리고 상트레테부르크에서 이뤄진 양해에 따라 러시아와 연합해서 조선 문제에 착수했다는 것입니다. 이 동맹을 통해 일본은 평화적 교섭을 하건 전쟁을 하건 성공을 보증할 수 있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그 정부는 동양에서 진취적 국가이자 진보의 대변자로서 평판을 높이는 과정에서 사무라이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고, 내부의 어려운 문제들로부터 주의를 돌는 데 성공할 것입니다. (중략) 저는 지난 5월에 조선에 2척의 전함을 파견한 것 또한 이 계획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은 당시 주일 영국공사 파크스가 일본이 조선에 사절을 파견하는 이유에 대해 본국에 보낸 보고서이다. 파크스는 1895년 5월(양력 기준)에 일본 정부가 운요호 등 2척의 군함을 부산에 파견한 목적을 내부의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라고 파악하였다.
당시 일본은 근대화를 우선시하는 내치파, 한반도 정벌을 주장하는 정한파, 의회 설립을 주장하는 입헌파 등 다양한 세력들이 대립하고 있었다. 파크스는 내치파가 주도하는 일본 정부가 조선 문제에 본격적으로 착수함으로써 내부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예상하였다. 실제 그의 예상대로 9월 20일 발생한 운요호 사건과 이어지는 강화도 조약의 체결로, 일본 정부를 주도하던 내치파는 자신의 입지를 단단하게 다질 수 있었다.
정말 적절한 시기에 운요호 사건이 터졌고, 이를 명분으로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것이다. 그렇기에 일본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과연 운요호 사건이 우발적이었을까에 대해서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2007년 **『**이토 히로부미 문서』가 재출간되면서 일본 정부의 프랑스인 법률 고문 보아소나드가 일본 정부에 제출한 의견서가 세상에 알려졌다. 의견서의 수신자는 공부경 이토 히로부미였고, 작성 시기는 운요호 사건이 일어나기 9일 전이었다. 핵심 내용은 운요호의 보상과 조선의 개항을 연계하는 교섭 전략이었고, 실제 일본 정부는 이 문서에서 제시한 대로 운요호 사건의 보상과 강화도 조약 체결을 연계하여 교섭을 진행하였다.
이 문서로 인해 운요호 사건이 우발적이었다는 일본의 주장이 거짓이며, 일본의 고위층이 운요호 사건을 치밀하게 계획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일본 정부는 언제부터 운요호 사건을 계획했을까? 이를 알려면 일본 내부의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한반도 무력 진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입장이 변화한 것은 대략 8월 말로 추론할 수 있다. 부산에서 돌아와 나가사키에 대기하고 있던 운요호 함장 이노우에를 홋카이도로 파견하려고 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8월 말경 일본 정부는 부산에서 교섭 중이던 모리야마를 철수시키고 곧이어 9월 20일(양력 기준)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다. 보아소나드 문서도 바로 이 사이 시기에 작성된 것이다. 이를 통해 8월 말에서 9월 초 사이에 한반도 진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입장이 변화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운요호에 공식적으로 지시를 내린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보아소나드에게 의견서까지 받은 일본 권력층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보기에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오히려 공식적 기록 없이 은밀한 방법으로 사건에 개입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인 설명일 것이다. 단독행동을 했다고 주장하는 함장 이노우에가 운요호 사건 이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1875년 8월에 일본 정부의 입장이 변화된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일본이 처한 대내외의 상황 변화이다. 그동안 오쿠보 도시미치로 대표되는 일본의 내치파는 러시아의 위협을 명분으로 정한론자의 주장을 묵살해 왔지만, 사가의 난 등 메이지 정부에 불만을 품은 세력의 반발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75년 8월 22일 ‘사할린-쿠릴 교환 조약’ 비준된다. 이로써 일본에 대한 러시아의 위협은 사라졌고, 내치파가 주도하는 일본 정부가 조선 문제를 미룰 명분도 없어졌다. 사족의 반란이 이어지는 불안정한 국내 정세 속에서 내치파는 조선과의 관계에서 어떻게든 성과를 보여야 했다. 만약 조선과의 조약 체결이 실패한다면, 내치파는 재기 불능의 정치적 타격을 받을 것이 분명하였다.
이때 운요호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내치파는 운요호 사건을 사절 파견의 명분과, 교섭의 수단으로 적절히 활용하였다. 결과적으로 일본 정부 입장에서는 정말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과연 이를 우연으로만 볼 수 있을까? 그러기에는 보아소나드 문서의 존재 등 맥락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상당히 많다.
※ 출처
「운요호 사건과 이토 히로부미」, 김흥수, 2009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 김흥수, 2022
『조일수호조규 근대의 의미를 묻다』, 한일관계연구소,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