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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상혁 Dec 17. 2022

대원군이 비변사를 폐지한 이유는?

비변사 폐지와 의정부 체제 구축, 무신의 지위 변화와 삼군부 복설

 

대원군은 집권 직후 조대비의 지원 속에 세도정치의 핵심 기구였던 비변사 개혁에 착수한다. 그 결과 비변사가 가지고 있던 정무 기능과 군사 기능은 의정부와 삼군부로 나누어 지고 비변사는 결국 폐지된다. 하지만 이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안동 김씨의 중심 인물인 김병기가 광주유수로 좌천되고, 김좌근이 영의정을 사직하는 등 상당한 반발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원군은 비변사의 기능을 왜 의정부와 삼군부로 나누었을까? 그 답은 대원군의 지지 기반과 관련이 있다. 조대비의 지원 속에 집권한 대원군의 급선무는 자신을 지지할 수 있는 세력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 때 그가 주목한 세력이 바로 무신이었다. 문신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차별 받던 무신들을 중용함으로써 그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 대원군은 삼군부를 복설하여 의정부와 대등한 위치로 격을 높이고 무신들의 지위를 향상시킴으로써 집권 기간 동안 무신들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구식 군인들이 흥선대원군을 다시 불러들이고자 했던 것은 대원군 시기 무신들의 지위가 높았던 것이 그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때문에 흥선 대원군 집권기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변사 폐지와 삼군부 복설, 무신들의 지위 변화와 대원군과의 관계 등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대원군 집권기 진행된 권력 기구 재편과 인적 구성의 변화를 함께 다루려고 한다.




1. 비변사 폐지


의정부와 비변사를 다 같이 묘당이라고 부르면서도 문건은 오직 비변사에서만 다루는 것이 몹시 이상하니 이제부터는 따로따로 다루는 것이 좋겠다. 

                                                                                                - 고종실록, 고종 1년 1월 13일 -



고종의 즉위하자 안동 김씨 세력은 비변사 구성원을 충원하고 측근 세력을 국왕과 권력 주변에 배치하면서 자신들의 권력기반을 유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시도는 조대비의 수렴청정에 의해 차단되었다. 조대비가 국왕의 인사권을 이용해 종친과 친대원군계 원임장신의 일부를 비국당상으로 비변사에 참여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친대원군계 정치인들을 의정부와 육조에 배치함으로써 대원군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핵심 인물로는 조두순(좌의정), 이경재(우의정), 이돈영(좌참찬, 호조판서), 김병학(이조판서), 정기세(병조판서), 임백수(예조판서), 신헌( 형조판서) 등이 있다.


이 과정에서 안동 김씨의 수장격인 김좌근의 영향력은 점차 축소되었다. 대원군과 정치적으로 제휴한 김병학이 안동 김씨 인물인 점을 고려하면 가문 내에서도 김좌근의 영향력이 약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상황이 이렇게 진행되자 결국 김좌근은 체제 개편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계품과 천망(관리 천거권)을 의정부와 비변사가 분속해 함께하는 방안을 제시했고, 곧이어 이를 받아들인 조대비의 지시에 의해 「본사정부분장절목」이 마련된다. 이로써 의정부는 원래의 업무로 복구되었고, 서북감사와 사도유수의 천망권을 행사하면서 독자적인 인사권을 행사하였다. 반면 비변사는 원래의 업무인 국방과 치안으로 역할이 한정되었고, 천망의 범위도 변방과 관련된 직책으로 제한되었다. 하지만 여전히도 비변사 내에 안동 김씨 세력의 군사적 기반이 존재했기 때문에 대원군은 이에 대한 대책도 마련한다. 그는 군권의 핵심이 병조판서에 있다고 판단하고 무반들이 병조판서가 되도록 체제를 개편한다. 그리고 병조판서에 친대원군계 인물들을 임명하고 용호군을 관할하게 함으로써 안동 김씨 세력의 군사적 기반마저 약화시킨다.


체제 개편 과정에서 영의정 김좌근이 정계를 은퇴(고종 1년 4월 18일)한다. 더불어 대원군은 차대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명분으로 기존의 비변사 당상을 대거 축출(고종 1년 11월 22일)하고 그 자리를 친대원군계 인물로 충당함으로써 비변사를 통해 권력을 행사하던 안동 김씨 가문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킨다. 그리고 의정부 건물의 중수를 추진하면서 비변사를 의정부의 조방으로 격하시키고(고종 2년 3월 28일), 비변사의 인장을 녹여 없앰으로써 비변사는 공식적으로 완전히 폐지된다.



2. 삼군부 복설 과정은?


  고종 2년 5월 26일 영의정 조두순이 경복궁의 영건과 의정부의 중수 및 6조 건물의 이전을 건의하면서 삼군부 복설을 처음 언급한다. 그는 훈련도감 및 오영의 사무실을 합설하여 삼군부라 하고, 국초처럼 의정부와 마주하고 있는 예조 자리에 두자고 건의한다. 이는 조대비 및 대원군과 사전 조율을 했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의정부 맞은편에 삼군부를 두자는 것은 무신의 지위를 문신들과 대등하게 격상시키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시기 편찬된 대전통편, 육전조례 등에 삼군부의 직제가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때까지는 대원군이 삼군부 복설을 급선무로 생각하지는 않았던 듯 하다. 다만 실권이 부여되지 않은 명목상의 삼군부를 인정하고, 물리적 공간만을 설정해 두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삼군부가 본격적으로 역할을 가지게된 계기는 무엇일까? 바로 1866년 발발한 병인양요이다. 병인양요 당시 독립적으로 군무를 총괄할 수 있는 기구가 없었기 때문에 순무영이 임시적으로 최고의 군령기관이되어 프랑스의 침략에 대응하였다. 이 때의 경험으로 대원군은 독립적으로 군무를 총괄할 수 있는 기구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에 대한 준비를 착수한다.


  고종 5년(1868년) 3월 23일 열무 행사 이후 영의정 김병학은 복설된 삼군부에 대한 인사를 건의한다. 시원임 장신들이 품계에 따라 영사 등의 겸함을 사용하고, 3군영(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장신들을 유사로 삼아 삼군부의 일을 살피도록 한 것이다. 고종은 이를 승인하였고 곧이어 인사조치가 단행된다. 고종 5년 6월 8일에는 국왕의 전교로 삼군부가 정일품 아문으로 규정된다. 동시에 시임당상을 삼군부 도제조, 병판을 제조로 겸임시키고 총융사를 유사당상으로 추가시켰다. 고종 8년 7월에는 좌우 포도대장을 삼군부 제조에 겸임케 함으로써 삼군부의 권위와 관여 범위를 확대시켰다. 그 결과 독자성을 지닌 최고의 군무 기관으로 삼군부가 자리잡게 된다. 그래서 1871년 발발한 신미양요에서는 병인양요 때와는 달리 삼군부가 최고 지휘부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3. 대원군 집권기 무신들의 지위 변화는?


  오랜 기간 비변사를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이어져 왔기 때문에 대원군은 집권 초반 지지 기반이 미약하였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대원군은 종친과 반 안동 김씨 세력을 결집해 비변사의 힘을 약화시키고 의정부 체제를 구축하였던 것이다. 이와 함께 그는 안동 김씨가 차지하고 있던 군권 장악을 시도한다. 군권 장악의 핵심이 병조판서에 있다고 판단한 대원군은 제도 개편에 착수한다. 무반의 경우 병조판서를 거치지 않아도 판의금부사가 되게 하고, 곧이어 무반의 품계가 정2품이 되면 병조판서의 후보자로 추천하게 만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무반 출신의 신헌이 병조판서로 임명된다.(고종 1년, 1864년) 신헌은 전통적인 무반 가문 출신이지만 정약용, 김정희의 문하에서 수학하는 등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김정희의 문하에서 수학했던 대원군은 학맥으로 연결된 신헌을 활용해 군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이듬해인 고종 2년(1865년) 3월에는 국왕의 인사권을 이용해 군영대장 인사를 단행한다. 이 때 임명된 임태영(훈련대장), 이경하(금위대장), 허계(어영대장), 이현직(총융직)은 모두 친대원군계 인물이었다. 병조판서와 군영대장에 친대원군계 인사들이 임명되면서 대원군의 군권 장악은 일단락된다.


  이후에도 무신들은 대원군의 비호 속에 경복궁 중건 사업에 참여하는 등 정치력을 확대해 간다. 고종 3년(1866년) 대원군은 군영대장을 병조판서와 같은 정2품으로 그 지위를 격상시킨다. 이는 두가지 중요한 변화를 수반했다. 먼저 병조판서와 군영대장의 지위가 같아지며서 군영대장이 병조판서의 통제를 받지 않게 된 것이다. 만약 병조판서에 안동 김씨 세력이 다시 복귀한다해도 이제는 병조판서를 통해 군권을 장악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 대원군은 각 군영대장에 신헌과 종친을 비롯해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인물들을 집중적으로 배치한다. 특히 국왕 호위와 수도경비를 맡았던 금위영은 종친만이 배치됐다. 두번째 변화는 군영대장 출신자들이 같은 정2품 품계인 육조의 판서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이다. 실제 군영대장 출신자들 다수가 판서로 보임되는데 대부분 형조와 공조 판서를 역임한다. 형조는 대원군이 정치적 반대 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곳이었고, 공조는 대원군의 토목 공사와 관련된 곳으로 모두 대원군의 통치 정책과 밀접하게 관련된 곳이었다.


  이렇듯 대원군은 집권 기간 동안 무신들의 지위를 꾸준히 향상시켜 자신의 지지 기반으로 끌여들었으며, 이들을 자신의 권력 강화와 통치에 적극 활용하였다. 그래서 대원군이 물러나면서 친대원군계로 분류된 군영대장 직임자들은 주요 관직에서 배제되었고 군영대장직의 품계도 정2품에서 종2품으로 다시 낮아지게 된다. 조영하, 민규호 등 반대원군 세력이 군영대장직을 장악하였고 삼군부 역시 무력화되면서 무위소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그 결과 대원군은 재집권할 수 있는 무력적 기반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참고 자료

1. 『대원군의 통치정책』, 김병우, 2006

2. 『흥선대원군 평전』, 김종학, 2021

3. 「대원군 집권기의 국방력 강화 정책」, 김영태,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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