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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ime Weaver Dec 16. 2022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 경복궁 중건과 흥선대원

경복궁 중건은 흥선대원군 집정기에 이루어진 대표적인 토목 공사이다. 교과서에서는 대원군이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경복궁 중건을 실시했으며, 대원군 몰락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짧은 설명이 경복궁 중건의 의미를 온전히 담아내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조정에서 단 한번도 공식 직함이 없었던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의 총 책임자로 국가 대소사에 관여할 수 있는 자격을 확보하였다. 경복궁 중건이 막후에서 대원군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 것이다. 때문에 경복궁 중건의 정치적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건도감과 대원군의 관계, 경복궁 중건 과정에서 대원군의 역할 등에 대해 종합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경복궁 중건이 시작된 과정은?

 경복궁은 조선 건국과 함께 정궁으로 세워졌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로 270년 이상 폐허로 방치되었다. 익종(효명세자)대에 경복궁 중건이 논의되었으나 재정적 어려움 등 현실적 이유로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지지부진했던 경복궁 중건이 공식화된 것은 고종 즉위 후인 1865년 4월 3일(음력) 조대비의 전교에 의해서였다. 조대비는 익종의 뜻을 계승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워 경복궁 중건에 대한 의지를 밝혔고, 다음날 고위관원들의 의견 수렴을 거친 뒤 경복궁 중건 공사 일체를 대원군에게 위임했다.

곧바로 이 공사의 영건도감이 구성되었고 도제조에 영의정 조두순과 좌의정 김병학, 제조에 이최응ㆍ김병기ㆍ김병국ㆍ이돈영ㆍ박규수ㆍ이재원, 부제조에 이재면ㆍ조영하ㆍ조성하를 임명하였다. 이최응ㆍ이재원ㆍ이재면 대원군의 일족이고 조영하, 조성하가 풍양 조씨 가문이며 박규수가 익종 때 활동했던 인물임을 고려하면 영건도감에 대원군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인물들이 결집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최근 발굴된 영건일기에는 18학사를 표방하며 경복궁 중건 사업에서 민간의 협력을 이끌어냈던 인물들의 명단이 있는데, 전주 이씨와 풍양조씨가 그 절반인 9명을 차지한다. 이는 영건도감의 인적 구성이 대원군과 조대비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채워졌음을 보여준다.


2. 경복궁 중건에 필요한 자금 마련은?

  조대비가 경복궁 중건의 의견을 물었을때, 대신들이 가장 크게 우려했던 부분은 중건에 들어갈 막대한 재원 마련이었다. 실제 도감의 회계 장부에 따르면 7년간 경복궁 중건에 소요된 총 공사비용이 783만냥이라고 한다. 1860년대까지 발행된 상평통보의 총량을 1,500만냥으로 추정하는 연구 결과를 생각한다면, 경복궁 중건에 막대한 비용이 소모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듯 막대한 재원은 어떻게 마련하였을까?

  중건 초기에는 왕실의 내탕금, 선파인들의 기부금, 부호에게 거두는 원납전 등으로 공사비를 충당했다. 이 중 절대 다수를 차지한 것은 원납전이었다. 영건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총 공사비용 783만냥 중 원납전의 징수액은 730만냥이고, 공사가 시작된 1865년 한 해에만 500만냥이 걷혔다고 한다. 하지만 1866년에는 병인양요 등의 영향으로 100여 만 냥으로 떨어졌고, 그 다음해엔 60만 냥에 그쳤다. 그러자 정부는 원납전의 강제 징수와 함께 ‘결두전’, ‘도성문 출입세’ 등 갖가지 잡세를 부과했다. 그럼에도 재정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1866년 12월부터 정부는 당백전을 주조해서 유통시켰지만, 이로 인해 급격한 인풀레이션이 발생해 결국 6개월만에 폐지되었다. 이후 중국에서 청전을 대량으로 들여와 재정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이 역시 사회적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3. 경복궁 중건의 과정은?

  영건도감에서 고종 2년(1865년) 4월 13일을 공사 시작일로 택일하여 올렸고, 20일에는 경복궁 담 밑에 있는 민가들을 철거하여 부지를 정리하였다. 28일에는 영건도감의 첫번째 공사 대상인 교태전과 궁성의 정초일을 6월 20일로 정하여 보고하였다. 이윽고 6월에는 건녕전, 교태전, 임생전, 경성전과 광화문, 건춘문, 신무문, 영추문 등 궁성문의 공사를 시작하였고, 9월에는 인지당, 천추전, 만춘전 등도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 때부터 1867년 사이에 대부분의 건물들이 건립되었다.

  경복궁 중건과 함께 육조 거리에 있던 주요 관아들의 청사 역시 중수되었다. 광화문 바로 앞에 있는 의정부 청사를 중수하고 그 건너편에 있는 예조 자리에 삼군부를 설치하였다. 세도 정치의 핵심 기구였던 비변사를 혁파하면서 의정부와 삼군부를 광화문 바로 앞에 둠으로써 고종 초년의 권력 구조 변동을 공간적으로 구현해 낸 것이다. 이 뿐 아니라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 법전의 편찬도 동시에 진행함으로써, 경복궁 중건이 전반적인 제도 개혁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66년 6월 23일 궁성과 네 문의 공사가 끝나고 외전 지역에 대한 공사가 본격화 될 무렵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병인양요가 일어나는 등 불안정한 정세가 이어졌다. 이 때문에 경복궁 중건이 한 동안 주춤했지만 1867년부터 다시 순조롭게 공사가 진행되어 8월부터는 대부분의 건물이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이듬해인 1868년 7월 2일 고종을 비롯한 왕실 전체가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이어함으로써 5년에 걸친 경복궁 중건 사업이 일단락되었다.


4. 영건도감이 존속된 이유는?

  고종과 왕실이 경복궁으로 이어한 것은 1868년 7월 2일 이지만, 영건도감이 공식적으로 폐지된 것은 1872년 10월이었다. 영건도감은 경복궁 공사가 끝난 뒤에도 4년여에 걸쳐 흥인문과 돈의문, 성균관, 종각, 종묘와 영녕전, 능원묘 등의 공사를 담당하였다. 그렇다면 왜 경복궁 중건이 끝난 이후에도 영건도감은 계속 공사를 주관하였을까? 이는 영건도감을 통해 권력을 행사한 흥선대원군과 관련이 있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중건 초기부터 자신과 연계된 인물들을 영건도감에 배치하고, 영건도감을 통해 실권을 행사했었다. 그래서 경복궁 중건이 끝난이후에도 쉽게 영건도감을 폐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경복궁 중건 이후에도 영건도감은 각종 공사를 주관하면서 선혜청 등 일반 관청에서 넘어온 재원을 활용하면서 재정 운용에 깊이 개입할 수 있었다. 때문에 1868년 경복궁 중건이 끝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영건도감을 유지했던 것이다.



참고 문헌  

1. 김종학, 『흥선대원군 평전』, 선인, 2021

2. 나영훈, 「고종대 경복궁 중건 원납전의 납부 실태와 배경」, 『서울과 역사』 제103호, 2019 

3.  배우성, 「경복궁 중건과 대원군의 정치」, 『서울과 역사』 제103호, 2019 

4.  홍순민, 「고종대 경복궁 중건의 정치적 의미」, 『서울학연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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