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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ime Weaver Dec 16. 2022

조대비가 흥선대원군을 선택한 이유는?

신정왕후(이후 조대비로 지칭)는 흥선 대원군의 집권을 이해하기 위해 꼭 알아야 할 인물이다. 조대비는 풍양 조씨 조만영의 딸로 순조의 세자인 효명세자의 부인이며 동시에 헌종의 생모이다. 그녀는 철종 사후 철종의 후계자로 이하응의 둘째 아들 재황(아명 명복)을 지목함으로써 고종 즉위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또한 경복궁 중건 사업을 추진하면서 영건도감의 책임자로 흥선대원군을 임명하여 흥선대원군이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였다. 흥선대원군은 공식 관직이 없었기 때문에 조대비의 배려가 없었다면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흥선대원군 집권 후 박규수, 신헌, 조성하, 조영하 등 풍양 조씨 가문이거나 효명세자 시기 활동했던 인물들을 적극 기용하는 등 1866년 조대비의 철렴 선언 이전까지 그녀와의 정치적 유대 관계를 유지해갔다.

  

1. 신정왕후가 흥선대원군을 선택한 이유는?

  그렇다면 조대비는 왜 이하응을 선택했을까?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먼저 조대비의 친정인 풍양 조씨 가문이 철종 재위 기간 몰락했다는 점이다. 철종 초년 풍양 조씨를 이끌던 조병헌이 사사되어 가문의 힘은 약화되었고 안동 김씨의 세도는 절정에 다다랐다. 이런 상황에서 조대비는 자신을 대신해 안동 김씨를 견제할 수 있는 인물로 1847년부터 종친부 유사당상을 맡아왔던 이하응이 눈에 띄었을 것이다. 더욱이 이하응은 친 효명세자계 인물로 풍양 조씨와 관계가 있던 김정희와도 사제관계였기 때문에, 안동 김씨를 견제하고자 했던 조대비에게 이하응은 필요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두번째로 조대비는 효명세자가 추구했던 국왕 중심의 정치 개혁을 이어가려고 했다는 것이다. 흔히 경복궁 중건 사업이 흥선대원군에 의해 처음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효명세자가 경복궁 중건의 뜻을 여러 차례 밝혔었고, 조대비 역시 경복궁 중건의 뜻을 밝힌 교지에서 이 사업은 익종(효명세자)의 뜻을 이어받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효명세자의 뜻에 따라 국왕 중심의 정치를 지향했던 조대비 입장에서 종친부 유사당상으로 종부시가 관리하던 선파인의 단자를 직접 관리하려 했고, 선원속보의 간행을 주도하는 등 선파인의 결속을 위해 노력해왔던 이하응은 자신의 뜻과 부합하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세번째는 이하응의 자식들을 제외하고 대통을 이어갈 왕족이 없었다는 현실적인 이유이다. 철종이 승하했을 때 왕실과 가까운 종친으로는 남연군의 후손들이 유일했다. 물론 새로운 선파인 중에서 입후를 통해 왕위를 계승시킬 수 있지만 이미 이하응을 포함 남연군의 후손들이 종친으로서 입지를 확보한 상태였기 때문에 다른 대안을 찾는 것보다는 남연군의 후손들 중에서 다음 국왕을 결정하는 것이 현실적이었다.


2. 어떻게 조대비가 철종의 후계를 지목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답을 위해서는 철종의 즉위 과정을 이해해야 한다. 헌종이 후사 없이 죽은 상태에서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은 안동 김씨 가문의 순조비 순원왕후 였다. 헌종이 승하하자 순원왕후는 사도세자의 후손인 전계군 이광의 셋째 아들 원범(이후 철종)을 왕으로 즉위시켰다. 이때 순원왕후는 철종을 자신의 양자로 받아들였는데, 이는 왕통과 가통에서 헌종이 배제되는 결과를 낳았다. “순조 - 효명세자 - 헌종 - 철종”의 계통이 아닌 “순조 - 철종”의 계통이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는 당연히도 효명세자의 비이자 헌종의 생모인 조대비의 입지 약화로 이어졌다. 반면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왕위 계승 방식은 조대비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였다. 1858년 순원왕후가 죽고 조대비가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 되었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1863년 12월 8일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했다. 조대비는 철종 승하 당일 바로 시원임대신들을 불러 소견한 자리에서 “흥선군의 적자에서 둘째 아들 이명복으로 익종대왕의 대통을 입승하기로 하였다.”고 말하고, 이 내용을 교서로 반포하도록 하였다. 이어 명복에게 익성군의 작호를 내리고 영의정으로 하여금 궁궐로 맞아오도록 하였다. 이는 순원왕후가 철종을 왕위에 앉혔을 때의 전례를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 안동 김씨의 반발을 차단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세도 정치기 왕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순조 - 순원왕후(안동김씨)

  * 효명세자 - 신정왕후(조대비, 풍양 조씨)

  * 헌종 - 효현왕후(안동 김씨)

  * 철종 - 철인왕후(안동 김씨)


3. 조대비는 왜 이하응의 둘째 아들을 지목했을까?

  남연군에게는 흥녕군(창응), 흥완군(정응), 흥인군(최응), 흥선군(하응) 등 4명의 아들과 6명의 손자가 있었다. 조대비가가 철종을 입후하여 왕으로 즉위시킨 순원왕후의 방식을 취하기 위해서는 익종 다음 세대인 ‘재’자 항렬에서 국왕 후보자를 찾아야했다. 그래서 익종과 같은 항렬인 남연군의 아들에 해당하는 ‘응’자 항렬은 후보에서 제외됐고, ‘재’자 항렬인 6명의 손자가 대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6명의 손자 중 이하응의 차자인 재황이 선택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입후 관계 때문이다. 흥완군의 아들 이재원은 남연군의 장자 흥녕군에게 입후되었고, 흥선군의 장남 이재면이 흥완군에게 입후되었다. 철종 승하 후 조대비의 명으로 이재면은 흥선군의 후사로 복귀되었고, 흥완군의 후사로 이재완이 입후되었다. 즉 6명의 ‘재’자 항렬 중 이재원, 이재면, 이재완이 입후관계였기 대문에 이들은 국왕 후보에서 제외되었던 것이다. 흥선군의 다른 아들 이재선은 서자였으므로 애초 대상이 되지 못하였고, 남은 후보는 흥인군의 아들 이재경과 흥선군의 차자 이재황으로 좁혀졌다. 하지만 이재경은 7세로 입후가 되기에 너무 어렸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남은 인물은 흥선군의 차자 이재황만이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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