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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상혁 Dec 18. 2022

대원군이 추진한 부국지책은?

- 서원 철폐, 사창제, 호포제

대원군 집권 당시 오랜 세도 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국가 재정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을 추진하여 막대한 재정을 소모하였다. 더욱이 1866년 병인양요 이후에는 국방비마저 급증하면서 국가 재정은 더 큰 위기를 맞았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대원군은 안정적인 재원의 확보를 목적으로 서원 철폐, 사창, 호포제 등 여러가지 개혁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이번 글에서는 대원군이 재원 확보를 위해 실시한 제도 개혁들과 그 한계를 살펴보려고 한다.   


1. 서원 철폐

 서원은 원래 선현의 제향과 유학 교육 등을 목적으로 세워졌지만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재지양반들의 백성 착취와 특혜의 온상으로 변질되었다. 서원이 소유한 토지는 면세의 혜택을 받았고, 서원에 소속된 사람들은 부역 면제의 특혜를 받았다. 농민들이 군역 면제를 받기 위해 자발적으로 서원 소속 노비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외에도 서원은 통문과 통첩을 돌리며 여론을 결집하고 당론을 조성하여 정부의 정책이나 인사에 적극 개입하며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많았다. 서원의 폐해가 커지자 숙종은 서원의 무허가 설치와 첩설을 금지하였고, 영조는 19개의 서원을 포함하여 총 173개의 사원을 철폐하였다. 하지만 이는 전체 서원의 일부에 불과했고 단기적으로 서원의 증가는 막을 수 있었지만 근본적인 대책은 되지 못하였다.     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안정적 재원과 인력 확보를 위해서는 서원 철폐가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집권 직후부터 서원 철폐를 추진한다. 고종 1년 7월 7일 조대비가 전국의 서원과 향사의 존페 문제에 관해 협의를 지시하였고, 사액서원에서 정해진 액수 이상의 토지와 노비를 보유한 현황을 조사하게 했다. 이어서 고종 2년(1865년) 3월에는 만동묘와 화양동서원의 철폐를 단행하였다. 만동묘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원군을 파병한 명나라 신종을 제사 지내기 위해 설치한 사당인데, 이미 창덕궁 금원(후원) 옆에 같은 목적으로 세워진 대보단이 있었다. 당시 노론 세력들은 만동묘 제향을 계기로 결집하여 그들만의 대명의리를 대행해 왔었다. 대원군은 만동묘를 철폐하고 대보단으로 제사를 일원화함으로써 노론 세력을 억압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 했던 것이다. 고종 5년(1868년)에는 미 사액서원에 대한 철폐가 이루어졌으며, 고종 8년(1871년)에는 사액서원을 포함해서 1명의 선유에 대해 중복 설치된 서원과 향사를 모두 철폐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오직 도학과 절의가 탁월한 사람만 문묘나 향사에 배향토록 조치한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이 진행되면서 1,700여 개에 이르던 서원은 결국 47개의 사액서원만 남고 모두 철폐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만여 명 이상의 연명 상소와 복합상소 등 유생들의 반발이 거셌지만, 대원군은 서원 철폐를 추진해 나간다.


2사창제

  사창제는 흥선대원군이 환곡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실행한 것으로, 관에서 주관하던 환곡을 대신해 민간에서 자치적으로 운영토록 한 제도이다. 사창제 실시를 처음 제기한 사람은 무관 신헌으로 이는 새로운 방어 체제인 민보 설치와 관련이 있다. 신헌이 제안한 민보는 요충지에 보를 설치하고 해당 지역의 백성이 이를 중심으로 수비하게 하는 제도였다. 이때 그는 민보의 책임을 사족이 아닌 향촌의 부민에게 맡기자는 제안을 한다. 난리가 발생하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계층이 부민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보 운영의 책임을 맡기면 자발적으로 사재를 내서 보를 운영할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같은 맥락으로 신헌은 사창의 운영 역시 부민들이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현실적으로 민보의 설치와 백성 구휼에 막대한 재정이 들어가므로, 향촌의 새로운 지배 계층인 부민들에게 재정 부담을 분담시킬 의도였다.     고종 4년 6월 6일 호조판서 김병국의 상소로 사창제 도입  논의가 본격화되었고, 12일에는 사창 운영 절목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는 기존 세력의 반발 속에 초기 의도와는 다르게 진행되었다. 백성들이 원치 않는다는 이유로 민보 설치는 좌절되었고, 사창은 관의 간섭을 받거나 사창 운영에 필요한 곡식이 중앙 재정에 귀속되는 등 왜곡된 형태로 운영되었다. 더욱이 사창 운영의 주체가 ‘근실하며 살림이 넉넉한 자’에서 ‘문벌이 있고 근실한 자’로 변화되면서 그 의미는 더욱 퇴색되었다. 사족 중심의 향촌질서라는 기존의 질서를 재편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던 것이다.


3. 호포제 실시

  군정의 개혁을 위해 고종 즉위 초에는 동포제가 시행되었다. 동포제는 고을마다 군포 할당량을 부과하면, 각 고을에서는 이를 다시 호구마다 배분하여 징수하는 제도였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양반도 징수의 대상이 되었다. 다만 동포제는 마을 단위로 수취한 군포를 ‘동포’라는 명목으로 집단 납부했기 때문에 호포제에 비해 양반의 반발을 상대적으로 크게 받지는 않았다.     1871년 고종의 전교로 호포제의 전국 실시가 공식화되었다. 호포제는 가구를 기준으로 군포를 납부하게 한 제도이다. 군포 수취의 기준이 ‘마을’에서 ‘호’로 변화된 것으로 귀천의 구분 없이 수취한다는 점에서 동포제와 큰 차이는 없었다. 하지만 양반들의 반발 정도는 달랐다. 호포제의 경우 반상의 구분 없이 호구 단위로 조세를 납부했기 때문에 양반들은 이를 신분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으로 간주하여 격렬히 반발하였다. 이에 대원군이 양반 가구에 한해 노비의 이름으로 군포를 낼 수 있도록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반 세력이 강한 지역에서는 호포제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1871년 이후에도 동포, 군포, 군전 등 온갖 명목의 군포제도가 난립한 것도 바로 그때문이다.


대원군의 재정 확충 노력은 비록 시행 과정에서 많은 한계를 노출했지만 결과적으로 대체적인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김윤식이 찬술한 대원군의 묘지명에는 ‘보관해 둔 물자가 날로 쌓여 붉게 썩은 것이 줄을 이었고, 태창의 곡식도 10년을 지탱할 수 있을 정도”라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대원군의 개혁은 관리와 아전, 토호들의 부정행위를 단속하고 조세 탈루를 막는 미봉책에 불과했다. 기존의 제도를 수정, 보완할 것일 뿐 새로운 국부의 원천을 발굴하여 국가 전체의 부를 늘리는 근본적인 대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원군이 물러난지 불과 1년도 안되어 국가 재정은 고갈되어 관리의 월봉을 지급하기 어려운 사태까지 맞이하게 된다. 당시 일본과 중국이 개항 이후 관세 수입과 같은 새로운 재원을 발굴하고, 이를 이용해 근대화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당시의 국내 상황과 국제 정세 속에서 대원군의 정책이 불가피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가 운영에서 지도층에게 필요한 것은 미래를 위한 비전과 이를 위한 준비이다.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 재원을 확보하는 것이 당시 필요한 최선의 비전이었을까? 생각해볼 부분이다.



참고 문헌   

『흥선대원군 평전』, 김종학, 2021

『정지된사간: 조선의 대보단과 근대의 문턱 』, 계승범, 2011

「전근대 사회보장제도 연구, 최화인, 2017

「신헌(1811~1884)의 내수어양론 연구」, 최진욱,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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