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ime Weaver Dec 22. 2022

러시아가 병인박해를 유발했다?

- 국내외 정세의 변화와 병인박해


 이 사람(대원군)은 천주교를 좋게 여기며 선교사와도 좋은 관계에 있어 적대시하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 서양인 8명이 여기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고, 나와도 안면이 있는 한 관료와 주교인 나에 관해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조선과 통상을 요청하는 러시아 사람들의 편지가 왔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내가 만일 러시아 사람들을 쫓아낼 수만 있다면 종교의 자유를 주겠노라고 그 관료에게 말했습니다.   
한국천주교회사, 샤를르 들레 -

위 글은 1864년에 베르뇌 주교가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서한이다.  대원군이 천주교와 어느 정도 교류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는 서양과의 통상수교를 거부하고 쇄국 정책을 고수했다는 대원군의  이미지와는 상반된다. 왜 그런 것일까? 그 답은 간단하다. 대원군이 집권 초기부터 서양 세력을 적대시하고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추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대원군은 집권 초반 선교사를 이용해 프랑스를 끌어들여 러시아를 견제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시도는 실패했고 대원군이 서양 세력과 접촉했다는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며 정치적 위기에 빠진다. 이에 대원군은 태도를 바꾸어 천주교 신자에 대한 대대적 탄압을 지시했는데, 이것이 바로 병인박해이다. 대원군은 병인박해를 통해 서양 세력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힘으로써 반대 세력의 공격을 벗어날 수 있었고, 위정척사 세력의 불만도 어느 정도는 누를 수 있었다.

병인박해를 시작으로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대원군의 통상수교 거부 정책은 더욱 강화되어 간다. 이번 글에서는 대원군 시기 통상수교 거부 정책의 시작을 알리는 병인박해를 다루려고 한다. 병인박해 이전 우리나라의 천주교 상황부터 병인박해의 원인과 전개 과정 및 영향까지 일련의 과정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1.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전 국내 천주교 상황은? 

 조선에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전래된 시기는 18세기 후반이다. 이 시기 천주교 전래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이 이승훈이다. 이승훈은 1783년 베이징에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는다. 1784년 귀국한 그가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주변인들과 함께 종교 모임을 가짐으로써 조선 최초의 교회가 세워진다. 1794년에는 외국인 신부로는 최초로 청의 주문모가 국내에 들어와 선교 활동을 하였고, 천주교의 교세는 나날이 확산되어 갔다. 하지만 순조 즉위 후 남인 계열에 대한 탄압 명분의 하나로 천주교가 이용되면서 천주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신해박해)이 일어나 이승훈, 주문모 등이 처형당한다. 이후에도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경신박해(1860년) 등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지속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1845년 김대건이 신부 서품을 받는 등 천주교의 교세는 꺽이지 않았다. 샤를르 달레의 『천주교회사』에 따르면 1859년 국내에는 프랑스인 신부 12명과 16,700여 명에 이르는 천주교 신자가 있었다고 한다. 

 대원군 주변에도 천주교 신자가 있었다. 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은 매일 기도를 하고 베르뇌 주교에게 감사미사를 청하는 등 천주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고, 고종의 유모(박 마르타)는 천주교 신자였다고 한다.  1864년 8월 18일 베르뇌 주교가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보낸 서한에 따르면 대원군 역시 천주교를 적대시하지 않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다보니 대원군이 집권하자 천주교도들은 적지 않은 기대를 가지게 된다.


2. 병인박해 이전 국제 정세의 변화는? 

 1858년 청과 러시아는 아이훈 조약을 체결해 연해주 지역의 지역의 공동 관리를 약속한다. 뒤이어 1860년 체결된 베이징 조약에서 러시아는 제2차 아편 전쟁을 중재한 대가로 연해주 지역을 자국의 영토로 인정받는다. 그 결과 조선과 러시아는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이 소식이 국내에 알려지면 러시아에 대한 조선의 경계심은 점차 높아져 갔다.  이 와중에 1864년(고종 1년) 2월 13일 러시아인 5명이 무단으로 국경을 넘어와 통상을 요구하는 서한을 경흥부사에게 전달한다. 당시 경흥부사는 외국과의 통상 결정은 지방관의 권한 밖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돌려보냈다. 하지만 러시아는 통상 요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듬해인 1865년 9월, 11월에도 러시아인들이 두만강을 넘어와 통상을 요구하는 서한을 제출하였고, 심지어 같은해 12월에는 수십 명의 무장한 기마대가 경흥부까지 와서 통상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물론 그 때마다 조선 정부는 월경의 불법성 등 갖은 이유를 들어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조선 내부에서는 러시아에 대한 대비책 마련이 급선무라는 의견이 높아져 갔다. 

 이 상황에서 대원군은 비밀리에 국내에 들어와 있던 베르뇌 주교에게 서한을 보낸다. 서한에는 프랑스가 러시아의 침입을 막아준다면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베르뇌 주교는 본인이 러시아 사람도 아니고 종교도 서로 달라 러시아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거절하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청에 머물고 있던 극동 프랑스함대 제독과 주청 프랑스 공사 베르데미에게 군함 1척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베르데미는 군함의 파견이 조선의 불신을 키우고 오히려 선교사의 안전을 위협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3. 병인박해의 과정은? 

 1865년 러시아의 통상 요구가 거세지는 가운데 천주교도인 김면호, 홍봉주, 이유일 등은 이 상황을 활용하기로 한다. 그들은 대원군에게 서한을 보내 서양인 주교를 통해 영국, 프랑스 등과 동맹을 체결하면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 수 있다는 의견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서한을 받은 대원군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홍봉주는 고종의 유모였던 박 마르타를 통해 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 민씨에게 같은 제안을 한다. 부대부인은 대원군에게 다시 한번 서한을 올린다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이에 박 마르타는 남종삼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대원군에게 보낼 서한 작성을 요청한다. 천주교도인 남종삼은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승지까지 올라간 인물로 문장에 밝은 인물이었다. 남종삼은 서한을 작성한 후 직접 대원군에게 전달하였고, 대원군은 김병학 등 주변에 있던 대신들에게 검토를 요청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상황은 긍정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상황은 몇일 만에 급변하였다. 대원군의 입장이 변화한 것이다. 남종삼이 지방에 있던 주교들이 서울로 올라왔음을 보고하기 위해 대원군을 찾아갔지만, 대원군은 지금은 급한일이 없다며 그를 돌려 보낸 것이다. 그 직후 한성부에서 베르뇌 주교의 심부름꾼인 이선이가 체포되었고 사흘 후에는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었다. 그리고 이틀 후인 1월 11일에는 조대비의 전교로 천주교도의 대대적 수색과 처형 지시가 내려진다. 이로써 시작된 병인박해는 1872년까지 이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베르뇌 주교를 포함해 프랑스 신부 9명과  8천에서 2만여 명에 이르는 천주교 신자가 처형당한다.


4. 흥선 대원군의 마음이 변한 이유는? 

 여기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베르뇌 주교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1866년 들어와 러시아 함대가 국경에서 물러나는 등 러시아와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소됐으며, 김병학을 비롯한 대신들이 반대로 대원군이 입장을 바꾼 것이라는 짐작만 있을 뿐이다. 부대부인 민씨가 박 마르타에게 대신들이 고종의 왕권을 뒤짚어엎으려했다고 말한 것을 고려하면 이는 타당한 추론인 듯 하다. 더욱이 조대비가 천주교도 처형 지시를 내린지 한달도 안되어 이례적으로 철렴을 선언하고, 김병학과 김병국 등 안동 김씨 가문이  조정에서 핵심 위치를 차지한 것 점도 이를 뒷받침 한다. 이는 흥선 대원군이 왕위의 안정을 위해 서양과의 통상을 반대한 안동 김씨 세력과 제휴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영의정에서 물러났던 안동 김씨의 핵심 인물인 김좌근이 1868년 삼군부의 삼군부영사가 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눈여겨볼 부분이다.


교과서에서 병인박해는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 사건이고 병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고 간단히 서술되어 있다. 하지만 이 설명은 병인박해를 온전히 이해하는데는 부족하다. 병인박해는 당시 국내외 정세의 변화 속에서 함께 파악해야 한다. 병인박해는 러시아 남하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일어났고, 병인양요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집권 초 지위가 불안정했던 고종과 대원군이 이 사건을 겪으며 국내 정치 세력의 재편도 이루어졌음을 유념해야 한다. 이렇듯 국내외 정세의 변동 속에서 병인박해를 바라본다면 그 시대를 더욱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한국천주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흥선대원군 평전』, 김종학, 2021

「제국주의에 갇힌 병인년의 사건」, 김희영

「흥선대원군과 조선교회 교구장 베르뇌를 통해서 본 병인박해의 원인」, 이용재, 2016


매거진의 이전글 대원군이 추진한 부국지책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