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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부인과 가는 게 무서워서 어떡해.

보호종료아동의 자립이야기.


 몇 년 동안 미루던 산부인과 진료를 받았다.


중학교 때 이후로 10년 만이었다. 대기의자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각자 핸드폰을 보고 있거나 함께 온 일행과 대화를 나눴다. 교복을 입고 진료를 기다리는 나에게 쏟아지던 시선들은 이제  수 없었다. 당시에 앳된 여학생이 산부인과 진료를 기다리고 있으면 배가 나왔는지 흘끔 들여다 보기도 하고,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혀를 차기도 했었다. 

 나는 부당하고 괴상한 시선들이 싫었다. 무슨 진료를 받으러 왔는지 묻는 데스크 선생님의 말에 "생리통 때문에요!"하고 크게 말하며 불쾌한 시선에 답했다.




출처: 네이버 블로그 wejoyful


 산부인과에 오기까지 우편으로 날아온 정기검진표를 수십 번을 꺼냈다가 도로 넣었다. 시간이 10년이나 지났어도 몸이 불쾌함을 기억했다. 어릴 적 개에게 물린 사람이 커서도 강아지를 두려워하듯 산부인과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벌써 공기가 텁텁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나는 오늘 처음 보는 의사 선생님께 통성명도 없이 속내부터 보여드려야 했다. 검사기구가 이리저리 내 속을 헤집어놓을 때는 끔찍하고 견디기 힘들어서 수차례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졸업한 모교를 다시 찾으면 건물도 운동장도 모두 작게 느껴지는데 산부인과 검사는 기억 속 공포 그대로였다.









 진료를 마치고 걸어 나오면서 황급히 이어폰을 귀에 넣고 음악을 틀었다. 내가 무언가로부터 도망가고 싶을 때 나오는 행동이었지만 당장 어떤 마음에서 도망가고 싶은지 찾을 여유가 없었다. 속에서 올라오는 감정들을 애써 무시하고 브런치 카페로 들어갔다. 주문을 하고 기다리는데 몸이 으슬으슬 춥고 밥도 먹기 전에 체한 느낌이 들었다. 내 속에 있는 아이가 방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 어두운 곳에서 있는 것처럼 슬펐다.


'왜 몸이 아플까. 난 왜 마음이 어지럽고 괴롭지?'






 예전이었다면 단순히 '컨디션이 안 좋은가 보다.'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내 마음이 보내는 신호라는 것을 눈치챘다. 아이가 문을 닫고 들어갈 때는 고립되고 싶은 게 아니라 이해받지 못해 속상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처럼, 지금 내게는 이어폰이 걸어 잠근 방이었다. 나는 내 안의 아이에게 말을 건네기 위해 일기장을 꺼냈다.









"지금 마음이 어때?


지금까지 잘해놓고 왜 이제 와서 이래? 투정 부리지 마.

이런 얘기한다고 누가 들어줄 거 같아?


 어렵게 고민을 꺼낸 친구에게 무슨 그런 고민을 하냐며 다그치지 않듯 내게도 다그치는 걸 멈추고 들어주었다.


 지금까지 혼자 하는 게 익숙했었던 나의 속마음.

나에게는 너무 당연한 일이라 힘들지도 아프지도 않다고 생각했었던 건 내가 마음을 들을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어떻게 괜찮겠어.

지금까지 이런 것들을 어떻게 혼자 다 하고 살았어?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고, 나조차도 외면해서 묻어두고 살았구나.

사실 투정 부리고 싶었구나."


 스물다섯 먹고 산부인과 가는 게 무서운 게 어때서. 굴욕 의자가 수치스럽고 눈물 날만큼 고통스러운 게 어때서. 아무도 내게 '뭘 그런 걸 가지고 유난이야.'하고 말할 수 없다. 내가 느낀 감정은 그 자체를 존중받을 수 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내 속에 있던 아이는 문을 열고 나와 나를 만나주었다.

그리고 눌러 놓았던 말들을 더 꺼내 주었다.









"지금까지 너무 당연하게 모두 잘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 미안해. 내가 가만히 있으면 아무도 대신 정해주지 않고, 해결해주지 않아서 그래서 떠밀리듯 해야 했던 건데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서 미안해."




 일찍 세상에 혼자 남겨진 이후.

내게는 살아남는 게 더 중요했었다. 배터리가 얼마 안 남은 핸드폰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기능들을 포기하고 절전모드에 들어가듯, 내 삶은 전화를 걸고 받는 것과 같은 기본적인 기능들을 유지하는 게 더 중요했다. 그러는 동안 몸은 어른이 되어가고 생각은 커졌지만, 마음은 혼자 방 안에 방치되었다. 이제부터 얘기할 내용은 이런 내용이다. 내가 나에게 용서를 구하고 화해하는 시간, 막힌 을 헐어가는 이야기들을 보여주고 싶다. 





 나는 사람들이 '원래 그런 사람'은 없다고 믿는다. 원래 개가 무서운 사람, 원래 화를 잘 내는 성격은 없다. 그 안에 담긴 사연들과 원인은 분명히 있다. 


 이 글에서는 창고에 박혀있던 시간을 꺼내 깨끗하게 닦아 볼 것이다. 그러면 버려야 할 기억인지, 간직해야 할 추억인지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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