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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하늘 May 26. 2024

쉼표가 되는 보건실

생계형 보건교사가 만들어갈 보건실

교직에 발을 들인 후 첫 발령지는 중학교였다. 당시 아직 어린아이를 키우고 있었기에 사춘기 아이들을 다루는 요령이 전혀 없었다. 특히 요즘 중학생들은 함부로 건들면 안 된다고, 무서운 사춘기를 겪는 중학교 2학년 들은 더더욱 건들면 안 된다며 조심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은지라 발령지를 확인한 후 걱정이 앞섰다. 만나게 될 중학생들은 임용합격 전 1년간 잠깐 만났던 초등학생들과는 다를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학교가 아주 처음은 아니고, 나 또한 아이를 키우는 엄마니까 괜찮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마음 한편에 담은 채 첫 출근을 했다.      


정식 발령일 전, 인계도 받고 보건실 정리도 미리 마친 상태로 3월 2일을 맞이했다. 시간강사가 아닌 보건교사 타이틀을 달고 온 첫 학교, 첫 방문 학생은 어떤 아이일까 잔뜩 긴장을 하며 대기했다. 첫 학생은 인상이 서글서글 좋고 붙임성도 있는 남학생이었다. 7년 전이지만 아직도 그 학생은 내 기억에 그대로 남아있다. 운동 후 허벅지 근육통으로 보건실을 방문했고, 나는 간단한 인사와 함께 첫 처치를 무사히 해냈다. 떨지 않고 잘했다는 안도감과, 남학생도 귀여운 면이 있다는 생각을 속으로 하며 걱정을 조금 내려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로 얼마 지나지 않아 교장선생님이 한 학생을 데리고 들어오셨다. 귀 뒤에 시작된 목까지 타고 내려가는 화려한 문신을 한 머리를 짧게 민 남학생이었다. 딱 봐도 저 학생은 ‘이 학교 일진인가?’싶은 생각이 드는 외모였다. 교장선생님은 ‘선생님~ 이 친구 문신을 좀 가려주세요~’라며 그 학생을 나에게 데리고 왔다. 예상치 못한 요구에 당황했지만 내 앞에는 새로 온 보건교사가 어떻게 하나 한번 봐보자 하며 매서운 눈빛을 쏘고 있는 남학생이 서있었다. 초장에 기선제압은 필수니까 어설픈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학생의 기에 눌리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빠르게 드레싱카트를 훑어보았다. 다행히 그 순간 내 눈에 테이핑밴드가 들어왔고, 내 행동에 전문가 느낌이 잔뜩 묻어나길 바라며 온마음을 다해 가위질을 하여 테이핑 밴드를 잘라 붙여주었다. 속으로는 ‘아! 정말 중학교는 문신도 하고, 눈빛도 무서운 애들이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나의 얼마 안 되는 교직생활 동안, 근무 첫 해에 힘든 아이들을 가장 많이 만났었다. 어리숙하고 미숙한 초보교사시절이라 아무래도 더 그렇게 기억에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온몸에서 담배 냄새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채 머리 아프다, 목 아프다, 쉬고 싶다 말하는 아이, 점심시간이 다 돼서야 학교에 오면서도 보건실에서 쉬다가 올라가고 싶어 하는 아이도 있었다. 도대체 소리는 왜 지르는지 이해할 수 없기도 했다. 알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달려가는 남학생들, 무리 지어 보건실 문 앞을 장악하며 소리를 꽥꽥 지르는 여학생들도 있었다. 매일같이 울면서 보건실을 찾아오는 아이, 교실에서 선생님들의 생활지도를 받던 중 반항을 하며 씩씩거린 채 학교를 뛰쳐나가다 잠시 보건실에 들린 아이들도 있었다. 내가 학창 시절에 알고 있던 그런 보건실이 아니었다. 아프다고 보건실을 가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직 초등학교가 국민학교이던 시절, 친구들과 계단에서 놀다 굴러 떨어져 두피가 찢어졌을 때, 찢어진 상처에 밴드를 하나 붙이고 엄마를 기다리던 것이 내가 기억하는 보건실의 전부였다.      


나는 선택해야 했다. 이 아이들을 딱 잘라 쫓아낼지, 아니면 받아주어야 할지 말이다. 나의 보건실이 어떤 곳이어야 할지 먼저 정의를 내려야 했다. 내가 만들어가야 할 보건실은 상처치료만 하고 아프면 약을 주는 기능을 하는 보건실의 본래 기능을 넘어, 이 학교에서 이 아이들을 품어주어야 할 마지막 보루 같은 곳이었다. 학교를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잠깐 자신의 억울함이나 분노를 누군가 들어주길 바라고 보건실 문을 열었을 그 아이들을 붙잡아 줄 수 있는 곳, 걸러지지 않은 아이들의 날것의 감정들을 포용하는 자세로 받아주는 선생님이 한 명이라도 있는 곳이 되길 바랐다. 그 아이들의 학창 시절에 내가 있는 보건실이 잠시 쉬어가는 쉼표 같은 곳이 되길 바랐다.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그다음부터는 고민하는 내 마음이 힘들지 않았다. 기본적인 규칙은 정하되 열린 마음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니 아이들이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보건실을 온 아이들과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아이들을 더 알아갈 수 있었다. 당시 유급위험으로 출결관리가 필요했고, 학교에서 제일 문제를 많이 일으키던 학생이 한 명 있었다. 어느 날 보건실에서 쉬는 그 아이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그 학생이 어릴 적에는 축구선수가 꿈이었는데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꾸 혼이 나면서 행동이 엇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꾸 사고를 치고 다니니 아버지와 사이는 더 안 좋아졌고, 불량한 생활태도는 선생님들의 지적사항이 된 것이다. 학교는 왜 다녀야 하는지 모르겠고, 일단 중학교 졸업장은 받아야 하니 나오기는 하지만 학교에 있는 이 시간이 너무 괴롭다는 것이다. 뛰쳐나가고 싶지만 이제 정말 유급까지 남은 결석일수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어떻게든 아이를 학교에 나오도록 하고, 나와서도 하교시간까지 일과를 잘 마칠 수 있게 도와야 했기에 너무 힘든 날에는 내려와서 보건실에서 하루 중 딱 한 시간은 보건실에서 보낼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었다. 아이는 학교에 나와 수업 듣기 힘든 날이면 보건실에 와서 나와 이야기도 하고 쉬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어떤 날은 담배를 끊는 방법과 노력에 대해, 어떤 날은 미래에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어떤 날은 생활태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와 보건실에서 보낸 짧은 시간만으로 이 학생을 변하게 할 수는 없었다. 결국 고등학교 진학을 한 후 얼마 가지 않아 이 학생이 자퇴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 아이와 함께 보낸 시간을 생각해 보았다. 처음 잔뜩 찌푸린 인상과 다르게 말을 하면 할수록 아직 어린애구나 싶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아무 생각 없이 사고를 치고 다니지만 내심 미래에 대한 고민을 품고 있던 속마음을 한 번씩 털어놓던 때도 있었다. 아무리 다루기 힘든 거친 아이들이라도 ‘애는 애구나’라고 느낄 수 있는 순간들이 문득문득 떠올랐다. 이후에는 이런 아이들을 만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단호하고 일관된 규칙을 제시하면서도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보건실을 만들어가니 아이들은 생각보다 나를 더 많이 의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같은 해에 교실에서 적응을 무척 힘들어하던 소심한 여학생이 있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도 잘 모르겠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너무 힘들고 가족들도 자신의 마음을 몰라준다며 매일같이 울며 나를 찾아왔었다. 나뿐 아니라 많은 보건교사들이 보건실에서 이런 학생들을 만나게 된다. 이때 보건교사가 아이의 속상함을 들어주고 달래주면 생각보다 아이들은 별거 아닌 우리의 행동과 말에 많은 힘을 얻을 때가 있다. 나는 매일 이 학생이 찾아오면 와서 충분히 울고 가도록 기다려 주었고, 아이가 힘든 마음을 충분히 털어놓을 시간을 주었다. 다른 일도 쌓여있고, 학생들은 계속 찾아왔지만 내가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으면 이 학생은 갈 곳이 없을 수도 있다는 그 생각 하나뿐이었다. 단 둘이 남을 때면 매번 학생에게 '너를 힘들게 하는 그 모든 것들에 휘둘리지 말고 네가 원하는 게 뭔지 계속 확인하고 스스로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 자신이 먼저 변해야 주변이 변하게 된다."는 어쩌면 뻔한 조언을 하곤 했었다. 그리고 매일같이 그 아이를 몇 분이고, 한 시간이고 달래고 토닥이며 교실로 보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잘 된 조언도 아니었고, 신규 보건교사가 머리를 쥐어짜며 던졌던 막연한 말과 행동이었는데 학생에게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의 도움이 되었나 보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한층 자신감을 얻고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함께 무척 기뻐했었다. 이후 그 학생은 대학생이 되면서 다시 연락을 주었고 자신이 찾은 해답은 글쓰기였으며, 중학교 졸업 후 글을 쓰면서 카카오페이지에 연재까지 하게 되었다고 했다. 자신이 그런 꿈을 꿀 수 있게 해 준 내게 감사하다는 연락이었다. 그냥 위로라고 생각했던 말이 한 아이의 삶의 방향이 되었다는 사실에 큰 책임감을 느꼈다.      

사실 나는 보건교사직에 대한 소명감이나 큰 뜻을 품고 이 자리까지 온 것이 아니었다. 간호학을 선택한 이후 한 번도 학교에서 근무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병원에서 육아휴직에서 빠르게 복귀하면 상근사무직으로 빼주겠다며 빠른 복직을 권유했을 만큼 어느 정도는 인정을 받고 있었던 중에 개인상황상 복직이 아닌 사직을 선택했었다. 이후 긴 육아기간 동안 정체되어 있다는 위기감, 그리고 경제적인 속박감에서 해방되고 싶어 선택한 것이 보건교사였다. 그래서 어떤 보건실을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이나 계획 없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준비 없이 보건교사를 하게 되었다. 지금도 말하기에는 부끄럽지만 보건교사라는 소명감보다는 생계형, 매달 월급을 받는 직업이라는 생각이 더 크다. 하지만 내가 만나는 아이들에게 내가 하는 말과 눈빛, 내가 보여주는 태도, 그리고 기회가 될 때마다 전하는 지식들이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때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기쁨과 보람이 조금씩 마음을 차지해가고 있다. 그리고 내가 앞으로 만들어가야 할 보건실이 바로 힘든 학교 생활 중 아이들의 쉼표가 될 수 있는 곳, 잠시 들러 아픈 몸을 쉬고,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고 갈 수 있는 곳이 되길 바란다. 그 마음을 담아 나는 매일 아침 여전히 학교를 뛰쳐나가고 싶은 그 순간 잠깐이라도 떠올리며 보고 싶어 할 보건교사가 되길 바라며 보건실 문을 활짝 연다.                                                            


보건실 이야기. 쉼표가 되는 보건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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