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얀솜사탕 Jul 08. 2024

오마카세 독서

나만의 독서법

 “너는 요즘 뭐해?”

 “점역교정사 준비하고 있어요.”


 이 말 한마디에 나는 지인 사이에서 대단한 책벌레가 되었다. 특히 근무시간 8시간 내내 책을 읽어야 하는 직장에 들어가자 그 이미지는 더욱 짙어졌다.


 이 자리를 빌려 고백한다. 나는 책을 전혀 안 읽는다. 직업 특성상 봐야 하는 일로서의 책 외엔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 독서란 일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나의 오랜 동경의 대상이지 나 자신은 아닌 것이다. 직업 하나로 순식간에 내가 갈망하는 이미지를 얻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으니 죄책감이 들 정도다.


 좋은 글을 쓰려면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데 왜 나는 그게 안 될까? 언젠가 책 한 권 내보겠다는 사람치곤 민망할 정도로 스스로 잡는 책이 없다. 신간 구입 후 시각장애인용 도서 제작까지 최소 3개월이나 걸리는 열악한 독서환경을 탓해 보지만 눈이 보였을 때도 안 읽었다. 게다가 이미 만들어진 책들이 차고 넘치지 않는가. 그러니 이건 다 핑계다. 진짜 심각하게 책을 안 읽는다.


 나의 독서량은 직업으로 인해 간신히 채워지고 있다. 한 달에 한 권, 많으면 세 권 남짓 일로써 읽는다. 이 정도 양으로는 필력을 키우는 데 그다지 도움 되지 않을 것 같다. 그럼에도 예전에 내가 쓴 글을 다시 보면 조금은 실력이 는 듯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신기할 뿐이다.


 혹시 나의 독서방법 중에 특별한 무언가가 숨어있는 걸까? 평소 책을 좋아하는 지인에게 물었다. 어떤 방식으로 책을 읽냐고 말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필력 성장의 원인을 발견했다. 나만의 독서 방법이 있던 것이다!


 나는 내가 접하는 모든 책을 전력을 다해 읽고 있었다. 표지디자인과 카피라이터, 마지막 페이지 ISBN과 값 15,000원까지 모조리 다. 거기에 취향이 아니더라도 몸이 배배 꼬이는 괴로움이 따르더라도 무조건 완독한다. 일로서 마주하기 때문에 당연해 보일 수 있지만 일반 출판업계에서도 모든 장르의 책 전면을 한 사람이 전부 담당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에 이토록 지독하게 책 전체를 씹어먹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점자 상에서만 존재하는 규정과 도서 제작 형식이 있기 때문에 어떤 책을 제작하더라도 점자화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지 검토하고 생각한다. 쉽게 말하자면 이미지 자료의 적절한 위치를 고민하고 표나 글 상자의 내용이 본문 이해에 반드시 필요한지 파악해 본다. 군더더기가 있는 글인지 핵심이 무엇인지 몇 번이고 읽는다.


 “뭐 그렇게까지 고민하면서 책을 만들어? 그냥 있는 그대로 만들면 되잖아.”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원본(시중에서 구입한 눈으로 읽는 책)을 그대로 제작한다고 하면 틀린 조언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모든 내용을 머리에 담고 자료 간의 관계를 고민해야 한다. 왜냐하면 점자도서로 제작하는 과정을 통해 원래 책의 2~3배까지 분량이 늘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점자책은 팔을 쉼 없이 움직이며 읽어야 한다. 분량이 늘어날수록 몸이 지치고 휴대성도 떨어진다. 시각장애인 학생들은 한 과목당 교과서가 2~3권이란 말이다. 그래서 방학이면 여행용 캐리어에 교과서를 담아 집으로 가야 할 수준이다. 이런 배경으로 책을 읽을 때 독자의 피로도와 가독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불필요한 장식과 정보는 삭제해야 독자가 부담 없이 완독할 수 있ㅇ으니 말이다.


 “윌리엄이 보고 싶다고 쉼표 사랑한다고 쉼표 말했다 마침표. 소설인데 이 문장, 쉼표가 너무 많네요. 원문 비교해주세요.”


 문장이 나올 때마다 글자를 손으로 만지고 입으로 내뱉으면서 그 속 오탈자를 찾는다. 문맥에 맞게 조사가 들어갔는지 끊임없이 확인한다. 수상한 부분은 비시각장애인 점역사와 원본과 비교하며 작업한다. 만약 원본에 오탈자가 있다면 올바르게 수정도 한다.


 거기에 글씨 한 톨 엇나가지 않도록 반복되는 단어는 작업이 끝날 때까지 모조리 외운다. 이런 탓에 등장인물 이름이 긴 러시아 소설이라든가 공룡 이름처럼 생소하고 복잡한 단어가 나오는 책을 담당하면 절망스럽지만 어쩔 수 없다. 도서 제작자는 독자이기 이전에 일반 대중에게 책을 전달해 주는 헤르메스다. 정확하게 전달하려면 고통은 감수해야 한다.


 일로 책을 읽다 보면 때로는 아쉬운 문장도 보인다. 그럴 땐 해당 문장을 어떻게 수정하면 더 좋을지 잠시 고민도 해본다. 물론 규정상 도서 제작에 반영할 순 없다. 그저 지극히 개인적인 아쉬움 해소를 위한 작업이랄까. 독립 출판, 베스트셀러 다 다루면서 이 세상 모든 책이 완벽하지만은 않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좋은 표현은 다른 단어나 주제로 응용해 보고 나쁜 글은 이리저리 다른 단어들을 넣었다 뺐다 하며 고쳐보기도 한다. 최상의 맛을 찾아 이것저것 넣어보는 요리를 하는 양 문장을 주물럭댄다. 작가들이 알면 불쾌할 수 있겠지만 업무를 계기로 글을 가지고 노는 것이다.


 시와 소설, 논문과 수험서. 가만히 있어도 골고루도 내 앞에 차려진다. 손뼉이 쳐지는 명작부터 시간이 아까워지는 엉망인 작품까지 나의 식탁에 오른다. 그것들을 나는 군소리 없이 글자 한 점 남기지 않고 싹싹 먹어 치운다. 맛에 감탄하기도 아쉬워하기도 하면서 작자 몰래 지금까지 책을 통해 모아온 재료들을 꺼내 넣고 맛을 비교해본다.   

 때로는 처음 보는 장르에 도전하고 평소 맛없는 줄 알았던 글감에서 뜻밖의 좋은 경험을 하기도 한다. 7년간 순전히 남이 차려준 밥상만을 받아먹은 덕분에 영양가 있게 골고루도 접했다.

 나의 이런 독서방식들이 내 필력을 조금씩 키워주고 있던 게 아닐까. 아직 출판사에 명함조차 내밀 수 없는 주제에 기세등등해져 본다.


 며칠 전 두 달 동안 작업하던 책을 털었다. 접시가 비워졌다. 이참에 작가 지망생으로서의 목표를 세워본다.


 “앞으로 더 책을 읽겠어. 1년 100권 도전하자!”


 글렀다. 상상만 해도 속이 더부룩해진다. 아무래도 지금처럼 일로 한 권을 제대로 정독하는 게 나한테 맞는 모양이다.


 책을 만들면서 책을 쓰고 싶어 하지만 절대 스스로 책을 잡지 않는 나. 다음 요리를 기다리며 비워진 접시 앞에 멀뚱히 앉아 있는 나. 아, 나는 오마카세식 독서를 좋아했구나. 누군가 던져주는 책을 보는 편이 나한테 딱 맞구나. 먹어보고 실망해서 쯔유랑 와사비를 몰래 넣고. 난생 처음 본 신기한 재로는 전문가한테 물어도 보고, 맛있으면 집에 가서 흉내 내 보고. 이 요리가 맨 처음에 나왔다면 더 좋았을 텐데 생각하며 코멘트를 다는 독서.


 다음 메뉴는 무엇일까. 빈 접시가 채워지길 기다리며 메일함을 열어본다. 이번 요리는 <내 머릿속 미술관>. 오랜만의 교양서적이다. 자, 이번엔 어떻게 뜯어 먹어볼까. 이 책은 무슨 맛일까. 먹기 성가신 책은 아니었음 좋겠는데. 나는 입맛을 다신다.

매거진의 이전글 바다를 손에 넣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