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로 기록된 성폭력의 증언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책 리뷰

by 보리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한 적이 있다. 나는 꽤 사랑받는 선생님이었다. 쉬는 시간이 되면 아이들이 공이나 줄넘기를 들고 새끼 오리들처럼 모여들었는데, 그중에서도 유달리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6살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내가 결혼하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고는, 6부터 20까지 수를 세더니 “14년 뒤에 결혼해요!”라고 말했다. 내가 들어본 가장 사랑스러운 고백이었다.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 기분 좋은 웃음을 짓는다. 학교 선배에게 고백받았던 이야기를 할 때 짓는 호기심 어린 표정과는 다르다. 맥락이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학창 시절에도 꼭 반에 한둘씩 선생님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우리 학교 상냥한 수학선생님은 정말 인기가 많았다. 아이들이 선생님을 좋아하는 일은 흔하다. 그런데 이 귀엽고 고마운 호의에 기분 좋은 웃음이 아니라 호기심을 피우는 선생이 있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의 문학 선생이 바로 그런 선생이다. 유명 문학강사인 리궈화는 자신을 좋아하고 동경하는 학생들을 방으로, 모텔로 데려간다. 그러고는 뛰어난 언어능력으로 강간을 사랑인 양 교묘하게 포장한다. 이 소설의 두 주인공 쓰치와 이팅도 리궈화를 좋아했다. 그중 쓰치는 리궈화의 레이더에 걸렸고, 이팅은 살아남았다.

강간은 길었다. 단짝 친구인 이팅이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하고, 매일 새로운 단어를 배우고, 대학 합격을 앞두고 미래를 꿈꾸는 동안 쓰치는 리궈화의 언어 안에서 13살로 남아있었다. 이 소설은 어떻게 이렇게 긴 강간이 이루어질 수 있었는지, 방치될 수 있었는지 들려준다. 선생은 교활하고 보호자는 어리석으며 세상은 불합리했다.





"이건 선생님이 너를 사랑하는 방식이야"

리궈화는 교활하다. 유능한 학원 강사의 권력으로 학생들을 끌어들이고 문학 선생의 유창한 언변으로 자신을 강간범이 아닌 사랑하는 연인으로 포장했다. 아직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한 소녀들은, 쪽지를 주고받는 설렘이나 고백하는 순간의 긴장감, 처음 손을 잡을 때 두근거림을 모르는 소녀들은 자신들이 사랑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선생님을 사랑하는 것. 좋아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내게 무엇을 하든 상관없지 않을까? 생각을 바꾸면 된다. 선생님을 사랑해야 한다. 안그러면 내가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혹은 사랑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강간은 '더럽혀지는 것'이니까. 하지만 사랑은 괜찮으니까. 선생님은 나를 사랑하니까. 자신만 선생님을 사랑하면 성폭력 피해자가 아닌 연인이 될 수 있다. 성폭력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성교육의 부재는 소녀들에게 삐뚤어진 선택지만을 남겼다.


“성교육이라니? 성교육은 성이 필요한 사람한테나 하는 거야. 교육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니?”
성을 금기시하는 사회분위기가 그에게는 최고의 방패였다. 여학생을 강간해도 세상은 그게 그녀의 잘못이라고 했다. 심지어 그녀 자신조차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죄책감 때문에 그녀는 그의 곁으로 되돌아왔다. 죄책감은 아주 오래된 순수 혈통의 양치기 개였다.

리궈화는 소녀들에게 남겨질 선택지가 자신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 점을 이용했다. 사회는 리궈화에게 방패를 쥐여주고 소녀들에게는 구린 선택지만을 남겼다. 청소년과 성을 분리하는 사회, 성관계 경험이 없는 것을 순결이라고 부르는 사회, 피해자의 치마 길이를 묻는 사회는 교활한 리궈화가 마음껏 활개 치도록 만들었다. 이 책의 마지막에 있는 사회학자 차이이원의 서평대로, 성에 관한 모든 폭력에는 사회라는 공범이 있다.


“우리 학교의 어떤 애가 선생님이랑 사귄대”
“어린애가 천박하기도 하지”
쓰치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 순간 그녀는 죽을 때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학창 시절 수학 시간마다 교탁에 선물과 쪽지를 올려놓던 내 친구들은 천박했을까. 그 마음이 필자를 좋아해 주던 6살 꼬마의 사랑스러운 고백과 뭐가 다를까. 교탁 위의 쪽지, 6살 꼬마의 고백, 쓰치의 동경은 모두 같다. 다른 건 수학선생님의 대처와 리궈화의 행동이다.

소녀들부모는 질타할 대상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선생님을 좋아하는 마음과 교제 사이에 있는 폭력을 지웠다. 그렇게 내뱉은 말은 쓰치의 입을 영원히 다물게 했다. 사회가 리궈화에게 방패를 쥐여주었다면, 어리석은 부모들은 리궈화를 대신해 창을 휘둘러주었다. 이런 식으로 긴 강간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리궈화는 보호받고 쓰치는 방치될 수 있었다.



린이한 작가 인터뷰
“선택할 수 있어. 이 세상에 소녀를 강간하며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모르는 척 살 수 있어. 강간당한 소녀가 있다는 걸 모르는 척 살 수 있어. (중략) 하지만 넌 그걸 기억할 수도 있어. 네가 그걸 기억한다면, 그건 너그럽지 못해서가 아니야. 이 세상 그 누구도 그런 일을 당해서는 안되기 때문이지.”

이 소설은 사회에 방치된 성폭력의 증언이다. 외면당한 일을 기억하고 기록한 책이다. '그 누구도 그런 일을 당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세상의 이면을 볼 수 있도록'

이 책은 읽기 힘들다. 집중하다가도 고통스러워 몇 번씩 책을 내려놔야 했다. 사실 책과 함께 고통도 내려놓을 수 있다. 덮어둔 책을 잊고 자기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만상을 찌푸려가며 이 책을 끝까지 읽기를 바란다. 작가도 그러길 바랐다.


“이팅, 네가 운 좋게 살아남았다는 걸 영원히 잊어선 안돼. 넌 쌍둥이 중에서 살아남은 아이야.”

이팅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운 좋게 살아남은 아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덮어둔 채 잊어버리더라도 이 고통이 결코 남의 일일 수는 없다.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 누군가의 이야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외면당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끝까지 읽어낸 후에는, 이 책의 비극을 바라보던 눈을 그대로 옮겨 세상의 비극을 바라보기를 바란다.




린이한,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허유영, 비채, 2018

Readmoo, 린이한 작가 인터뷰, 유튜브, https://youtu.be/1Y2wS80jm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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