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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혁이창 Nov 14. 2024

팔자에도 없었던 시드니 공항에서

나는 지금 시드니 공항이다.

난데없이 나는 지금 시드니 공항에 있다. 분명히 피지에서 열리는 스파 컨퍼런스에 참석차 인천에서 떠났는데, 계획에도 없었고 내 인생 처음 와보는 시드니를 나는 어쩌다 이렇게 와 있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인천에서 피지로 가는 직항은 없기에 나리타를 경유하여 피지로 향하는 티켓을 끊었다. 체크인을 하는데 아시아나 카운터의 직원이 내가 가진 티켓이 최소경유가능 시간으로 타이트하게 잡힌 스케줄이니 경유할 때 조금 서두르시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살짝 불안한 감은 있었지만 슬쩍 쫄리는 게 재밌겠다 싶기도 했다.


인천에서 비행기가 30분 이상을 뜨지 못했다. 한참을 뱅뱅 돌고 죄송하다는 안내방송을 몇 차례 했다. 슬슬 재미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겨우 뜬 비행기는 나리타에서도 바로 내리지 못하고 차례를 기다리며 우회하다 착륙했다. 결국엔 티켓에 적혀있던 도착시간보다 40분 늦게 도착했다. 재미는 없어진 지 오래였고, 아 뛰어서라도 피지행 비행기를 타야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비행기 게이트를 빠져나오는데


나리타 공항 아시아나 직원이 NADI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있었다. 내가 가야 하는 피지 공항의 이름이었다. 보니 옆에는 나랑 같은 비행기로 추정되는 60대 정도로 보이시는 남성분도 잡혀있었다. 이미 피지항공에서 게이트를 닫은 상태라 아시아나에서 다시 티켓을 구해드려야 할 것 같다며 죄송하다고 했다. 허허.


이런 상황에서 불만을 터뜨린다고 바뀌는 거 하나 없다는 걸, 여기 나와 있는 직원은 연착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걸 알기에 나는 그럼 방법이 무엇이냐며 부드럽게 물었다. 조금 신기했던 건 나와 같이 잡힌 60대 남성분도 차분하고 정중하게 방법을 물으셨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난리를 치는 광경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기에 조금은 낯선 마음이 들긴 했다.


직원이 세 분이나 나와서 피지로 갈 수 있는 경우의 수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먼저 나리타에서 호주 브리즈번을 들러 한번 더 경유하고 피지로 가는 티켓으로 괜찮겠냐고 물었다. 다른 옵션은 없어 보였기에 나와 60대 남성분은 그러겠다고 했다. 그런데 또 한참을 분주하더니 그 티켓은 브리즈번에서 아예 나갔다 다시 들어와야 해서 비자가 필요할 거라 이 방법으론 어렵겠다고 했다.


직원들이 다른 방법을 찾는 와중에 60대 신사분은 피지에 어떤 일로 가는지를 내게 물으셨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분은 피지에서 20년 넘게 지낸 교민이셨다. 곧 피지에서 해군사관학교에서 순항훈련차 피지를 들리고 그곳에서 함께 나눌 음식들을 한국에서 가져가시는 중이라고 하셨다. 도란도란 나누던 이야기 사이로 갑자기 아시아나 직원이 상기된 표정을 밀어 넣으며 말했다. 지금 바로 하네다 공항으로 가서 비행기를 타야 할 것 같다고.


나리타에서 갈 수 있는 방법은 더 이상 없고, 하네다 공항에서 시드니를 경유해서 다시 피지로 가는 티켓이 유일하다고 했다. 하네다에서 시드니를 가는 비행기는 저녁 7시 10분 출발, 이 말을 전하는 바로 그 순간이 5시였다. 버스 티켓을 끊어드릴 테니 그걸 타면 한 시간이면 하네다까지 갈 수 있고 서두르면 그 비행기를 탈 수 있다고 했다. 또 서두르면..?


60대 신사분과 수하물을 들고 뛰어주신 직원분,,


직원들이 60대 교민분과 나를 긴급 게이트로 빠져나가게 하면서 그 와중에 붙였던 수하물도 찾고 겨우 버스에 오른 시간이 5시 5분. 창밖으로 도쿄 시내의 건물들과 일몰이 눈에 들어왔다. 예정에는 없었던 일이지만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즐기자는 마음으로 한참을 보았다. 문제는 그 아름다운 일몰 시간은 도쿄의 퇴근시간과 겹쳤는지 그 직원이 말했던 한 시간이 이미 지나가고 있었다. 허허.


하네다행 버스,,


하필 우리 비행기는 3 터미널이었는데, 버스는 2 터미널 - 1 터미널 - 3 터미널 순으로 하차했다. 3 터미널에 도착하니 6시 20분이었다. 옆 자리에 앉아 있는 60대 신사분의 표정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맞다. 자칫 잘못하면 이번 비행기도 놓치기 십상이란 걸 나만 알고 있는 게 아니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내 캐리어 하나를 집어 들고뛰려 했는데, 60대 신사분은 아주 커다란 박스 두 개가 수하물이었다. 안면을 튼 지 불과 3시간 정도지만 이미 생긴 전우애가 있는데 혼자 뛸 순 없었다. 뛰어서 신사분을 위한 카트를 집어왔다.


그리고 3층 출발층으로 함께 올랐다. 그들이 잡아준 비행기는 JAL이었기에 바로 찾아가 앞뒤 내용을 전하면서 체크인을 요청했다. 일본인 JAL 직원은 미안한데 이미 그 비행기는 체크인 타임이 6시 15분에 끝났다고 했다. 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을 듣는데 웃음이 났다. 헛웃음이었을 거다 아마도. 그래도 방법이 없냐며 신사분과 일본인 직원을 번갈아보며 묻는 와중에 하네다 아시아나 직원들이 등장했다. 나리타 아시아나 직원에게 문자를 받았다며...


안된다고 했던 JAL 직원들은 체크인을 시작했다. 수하물을 다시 붙이고 JAL 시큐리티 직원 한 명을 부르더니 이 분과 함께 또 뛰어서 게이트까지 가야 한다고 했다. 어 아직 안 끝났구나... 그렇게 함께 신나게 뛰어서 게이트 앞에 도착했더니, 다행히도 게이트 보딩타임이 20분 정도 딜레이 되어 있었다. 그제서야 신사분께 고생하셨다는 인사를 전하고 피지에 먼저 도착할 미국팀 멤버에게 이쪽 사정을 전달할 수 있었다.


겨우 받아낸 보딩티켓,,


그리고 드디어 하네다 공항에서 시드니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렇다. 나는 하네다 공항에 갈 생각도 없었고 시드니는 더더욱 그랬는데, 이렇게 됐다. 조금이라도 편하게 가려고 원래 잡았던 피지항공에는 엑스트라 레그룸까지 추가비용을 내고 자리도 미리 잡아뒀는데 아무 소용없이 내 자리가 어딘지도 모른 채 시드니행 비행기에 올랐다. 지금은 비행기에서 내려 시드니에서의 8시간 레이오버 중이다.  


계획했던 대로 하나도 되지 않았다. 어긋나버린 이후 다시 예상한 그림대로도 하나 되지 않았다. 미리 준비했던 안락한 비행은 온데간데 사라졌고 하루종일 뛰어다닌 하루였다. 비행시간에 대기시간까지 하면 원래 일정보다 12시간이 더 늘어났다. 하지만 나는 모든 순간에 긍정하려 했다. 끝내 60대 신사분과의 의리를 지켜냈고 예정보다는 늦지만 나는 피지에 도착할 거다. 안절부절못했던 나리타의 아시아나 직원에게 나는 괜찮다고 웃으며 말했고 연신 죄송하다고 인사하는 하네다의 아시아나 직원들에게도 미소를 보였다. 정말 괜찮았다기보단 주어진 이 상황에서 긍정하려 했다.


인생 같았다. 내가 계획한 대로 예상한 대로 준비한 대로 하나도 되지 않는 내 인생 같았다. 다행히도 오늘 보니 예전엔 벌컥 들던 조바심이나 두려움이 많이 줄었다. 예상치 못한 순간순간에서도 나는 즐거움을 찾아보려 애쓰고 있었다. 창밖 도쿄의 일몰도, 60대 신사의 인상과 말투도, 아시아나 직원들의 표정들도 놓치지 않고 잘 보고 담아두려 했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바꿀 수 있는 건 내 마음상태뿐이었다. 그 마음가짐을 더 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의 나의 인생도 계획한 대로 예상한 대로 준비한 대로 흘러가지 않을 것이고, 그럼에도 소중한 나의 삶일 테니 나는 그 마음가짐을 더 잘해보고 싶어졌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가 삶이 아니라 아직 시드니에 있는 지금의 이 과정들이 삶일테니!  

맞다. 근데 나 아직 시드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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