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이곳 위빳사나 명상을 오기 전 걱정스런 마음에 판교로 달려온 부모님은 내게 물어보셨다. 요새 고민이 많냐고, 마음이 불안하냐고. 나는 가장 안정되고 편안한 마음으로 지내는 것이 요즘이고, 그저 마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다루는 방법이 궁금해서 가는 것뿐이라고 말씀드렸다. 아부지는 너가 첫 사업을 시작했던 그때에는 집안에서도 행복전도사를 자처하며 가족들에게 행복해야 한다고, 돈과 명예보다도 더 중요한 건 행복이라고 말하던 큰아들이 언젠가부터 이런 얘기들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며. 그래서 이번에 명상센터에 가는 것도 걱정이 앞섰다고 하셨다.
행복전도사..?
잊고 있었다. 그랬다. 내가 처음 사업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그날은,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며 미국회계사가 되어 돈도 많이 벌고 그럴싸한 사회적 위치도 쟁취하여 보란 듯이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 지내다 잠시 방학을 맞아 한국에 들어와 한강을 혼자 뛰었던 바로 그날이었다. 한강을 뛰며 상상했다. 자랑스럽게 어메리칸 드림을 이뤄낸 당당한 회계사가 된 나의 모습을. 부모님의 자랑이자, 친구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 두둑한 연봉을 받으며 미국대륙 한복판에서 지낼 멋진 나의 모습을. 그런데 뭔가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무겁고 단단한 무언가가 가슴에 콱 박혀있는 것처럼 답답했다.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렸던 것 같다. 답답한 그 느낌이 싫어서 한참을 달렸다. 이내 후련한 기분이 느껴졌다. 조금만 더 달리면 친한 친구네 집이 나오는 방향이었다. 그대로 더 내달려서 친구 집 근처로 가 친구를 불러내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서 마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한참을 웃고 떠들다가 다시 달려서 집으로 향했다.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아빠엄마 얼굴을 떠올리니 이내 마음이 따뜻함으로 가득했다. 가볍고 밝은 마음으로 가슴이 가득 찼다. 너무 가득 차서 마치 가슴이 뻥 뚫린 것 마냥.
그날 나는 마음을 정했다. 적게 벌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인정이 없더라도 이렇게 후련하고 뻥 뚫린, 가볍고 밝은 마음으로 살고 싶다고 마음을 정했다. 내 운명을 내가 정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며, 덜 욕심부리고 더 행복하게 살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저녁밥을 함께 먹기 위해 식탁에 앉아 계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행복하게 사셔야 한다고.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렇게 시작한 첫 사업이었던 플렉스파워를 운영하는 내내 나는 행복전도사였다. 맨 땅에 헤딩하듯 스물다섯 살이 시작한 사업에 뭐 얼마나 대단한 결과를 바라겠나. 나는 초반 1-2년 동안 최소한의 생활만 할 수 있을 정도로 급여를 받았다. 밥값을 아끼려 대부분은 집밥으로 해결했고 집값을 아끼려 부모님과 함께 살며 그렇게 지냈다. 그럼에도 기대했던 대로 나는 행복했다. 쥐뿔도 없으면서 늘 부모님과 주변 친구들에게도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침을 튀기며 말하고 다녔다.
잊고 있었지만 두 번째 창업인 미팩토리를 운영하던 때도 나는 행복을 전도하고 있었다는 게 떠올랐다. 미팩토리 직원들이 30명 정도 됐을 무렵이었을 텐데 직원들을 대상으로 사내 강연을 했던 게 기억이 났다. 직원 중 한 친구가 플랜카드까지 만들어서 강연날 타운홀 공간에 걸어 주었던 게 기억이 났다. 우리가 하는 이 일도, 이 시간들도, 옆 동료들도 다 우리 각자가 행복하기 위함이라는 얘기를 또 침을 튀기며 전했다.
그렇다면 행복전도사의 전도는 언제 멈춰진 걸까. 아이러니하게도 예상치 않게 미팩토리를 매각한 2018년 말쯤이었다. 회사는 성장하고 있었고 회사를 매각하고자 하는 생각은 전혀 없었던 창업 4년 차 때였다. 미샤라는 브랜드로 알려진 에이블씨앤씨에서 우리 회사를 인수하고 싶다고 왔는데 매각 생각이 있냐고 함께 창업한 친구가 내게 물었다. 나는 굳이? 라고 답했지만 함께 미팩토리를 창업한 친구는 의지가 있었다. 너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자고 말했더니 딜이 급했던 미샤측에서 빠르게 모든 것들을 준비했고 빠르게 진행됐다. 적게 가지고 조금 불편해도 행복하기만 하면 됐다며 내 사업을 시작한 지 8년 만에 나는 엑싯하여 적지 않은 돈을 벌었다.
바라지도 않았던 일이었지만 일어났다. 세상 사람들이 행복의 전제조건으로 말하는, 경제적 자유였다. 내 인생 통장 잔고에 돈이 가장 많았던 2019년이었다. 시간적으로도 가장 여유가 있었던 2019년이었다. 원하는 집으로 이사를 하고, 원하는 차를 탈 수 있었다. 여행을 가고 싶으면 언제든, 먹고 싶은 게 있다면 무엇이든 먹을 수 있었다. 누가 보아도 가장 자유로워 보이는 그때,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정말 이상하게도 행복하지 않았다.
경제적 자유를 확보하고도 나는 왜 행복하지 않은지를 탐구하기 시작한 것이 2020년부터였다. 한강을 뛰다 마음을 먹고 사업을 시작한 2011년부터 그 행복만을 위해 달려온 것이었는데, 행복을 가져다 줄 것으로 보였던 조건들을 9년에 걸쳐 모두 갖췄음에도 왜 나는 행복하지 않고 공허한지를 알아야만 했다. 주변에서는 내가 가진 것을 부러워하기도 했지만 나는 우울했다. 그렇게 시작한 탐구가 나를 알아가는 것으로 이어지고, 최진석 교수님의 철학학교로 이어지고, 법륜 스님의 불교대학으로 이어지다 전라북도 진안에 위빳사나 명상센터까지 와 있게 했다.
그랬다. 나는 행복하고 싶었다.
그 이유로 2011년에 창업을 하고 15년이 지나서야 나는 편안해졌다. 행복을 돈과 시간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2020년부터 오롯이 그 방법을 탐구하는데 5년을 쏟아 붓고서야 나는 편안해졌다. 나는 보다 편안해졌다.
다시 말하자면, 하루에 행복함을 느끼는 시간이 길어졌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삶을 대하는 태도가 보다 가벼워졌고 즐거워졌다. 어떤 외부적 요소로도 채우지 못했던 마음의 상태를 이제야 조금씩, 아주 조금씩 더 잘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어디서 읽어서가 아니라, 누구에게 들어서가 아니라 내 마음의 상태를 가장 잘 아는 내가, 찾고 찾고 찾아왔던 것이 이곳 언저리에 있다는 것을 매일같이 느끼며 더듬는 요즘이다.
이 마음의 상태를. 이 편안함을. 이 행복함을.
나 혼자가 아닌, 나의 가족, 나의 친구들, 나의 동료들, 같은 한국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 나아가 전 세계 사람들과 나누는 삶을 살게 되겠구나. 아. 나는 그렇게 살기 위해서 평생을 다 바쳐서 이걸 궁금해했구나. 너무나도 알고 싶어서 내 삶을 통째로 집어넣어 직접 알아보고 싶었구나. 이제는 평생을 다 바쳐서 이 마음의 상태를 한 명이라도 더 가질 수 있도록 나를 쓰며 살겠구나.
마치 눈앞에 고속도로가 뻥 뚫린 것처럼. 어떤 일을 어떻게 하며 살아야 할지가 보였다.
그러자 전에 읽었던 구본형 선생님의 글귀가 문득 떠올랐다.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이것이 가장 훌륭한 질문이니
하늘에 묻고 세상에 묻고 가슴에 물어 길을 찾으면
억지로 일하지 않을 자유를 평생 얻게 되나니
길이 보이거든 사자의 입속으로 머리를 처넣듯
용감하게 그 길로 돌진하여 의심을 깨뜨리고
https://www.youtube.com/watch?v=qe9PRKS9DY4
그렇다.
사자의 입속으로 머리를 처넣듯 용감하게 그 길로 돌진하면 되는, 그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