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쯤 센치해질까요
위 노래의 "한 발짝 뒤에 섰던 우리는 언제쯤 센치해질까요"라는 가사를 들여다본다. 여기에서 '센치하다'는 말은 주로 사람 간의 관계나 개인의 마음에 관해 말할 때 쓰는 것 같다. 더더욱 이성적으로 변모하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의 세상살이에서는 센치함이 사라지게 된다. 가장 가슴 뛰는 일을 찾아 이상을 좇는 것은 허울뿐인 말이 되어버렸다. 둘 중 무엇을 택할 것인가. 무책임하게(?) 하고 싶은 것을 할 것인가, 아니면 사회가 제시하는 틀에 자신을 맞추어 갈 것인가. 나에게는 지금이 전자를 try해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최근 '트랜스포머 원'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내 마음속의 불씨가 다시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주인공 '오라이온 팩스'가 주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소신을 지키는 것이 어리석게만 보인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권위에 합당한 모습들을 보여주며 빛나는 '옵티머스 프라임'이 되고야 만다. 물론 낙천적이고 도전적이라고 해서 누구나 '프라임'이 될 수는 없다. 여기에서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데 이제야 해가 뜰 시간이야 그래 그리고 안 뜨면 뭐 어때 그냥 암순응하고 살아가면 되지 그래"라고 말하는 다음 노래가 떠오른다.
나의 경우 어렸을 때부터 천체물리학자가 되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과학영재학교를 지망하게 되었고 사력을 다해서 겨우 들어갔다. 하지만 몸과 마음의 건강과 우주에 대한 순수한 꿈까지 잃어버린 자신을 마주하게 되었다. 근사한 간판에 의지하려 하기보다 원래의 꿈만을 계속 좇았더라면 어땠을까. 비유하자면 마치 항해를 할 때 거친 물살을 어떻게든 헤쳐나가는 것에만 집중했던 것 같다. 그러지 않고 자칫 험한 파도에 휩쓸릴 위험을 감수하고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항로를 따라갔더라면 결국 목표했던 지점에 도착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지금 나는 과연 내가 진정 행복할 수 있는 길로 나아가고 있는 걸까. 위 노래의 가사에서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말로 작은 위안을 얻는다. 그다음 나오는 '암순응'이라는 단어가 조금 걸리지만 말이다. 해가 뜨지 않는다면 끝이 안 보이는 어둠도 각오해야 한다는 사실을 애써 밝게 풀어낸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오늘의 행복을 별빛 삼아 나아가려고 한다. 오래간만에 글쓰기에 집중하다 보니 마음이 참 편안하다. 아무래도 나는 결과의 척도를 과정에서의 만족감에 두어야 할 것 같다. 글쓰기처럼 행복한 일을 업삼을 수 있도록 오늘도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