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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평살이 Apr 28. 2021

신경숙작가의 <아버지에게 갔었어>

가족이 그려낸 아버지의 현시. 아버지는 그렇게 가족에게 갔었어.

<아버지에게 갔었어>는 신경숙작가가 8년여만에 내놓은 단행본이자 11년만의 장편 소설이다. 2015년도에 일어났던 표절시위는 항간에 문학권력논쟁에 불을 붙이는 사건이었고, 이에 일조한 창비 라는 출판사의 태도 또한 문제가 되었었다. 물론 이와 무관하게 작품에 대한 올 곧은 평가 할 필요가 있기에 표절논란을 잠시 차치하고 작품을 몰입하며 읽었다.


아버지란 누구일까. 대한민국에서 아버지의 몽타주는 엄격한 표정을 힘껏 지으며 권위적으로 지시하는 가부장적인 남자의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 이미지는 두 아들을 가진 우리 어머니에게 해당되기도 한다. 즉 가정의 스피커라는 건 남성 위주로 대체 되어야만 하는 어떤 불가항적인 속성과 같았다. 아버지의 힘이란 가정에서 넘어 설 수 없는 성역이자 법이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어떻게 불려 지는가. <아버지에게 갔었어>란 제목에는 두 가지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느 곳에 악센트를 주고 끊고 발음하는 가에 따라 의미는 극명하게 달라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악센트 없는 부름은 긍정적으로 들려진다. 예를 들어 아버지/에게/갔었어라고 부른다면 마지 못해 부르는 것 같지만, 아버지에게 갔었어라고 끊지 않고 부른다면 본래 그 사람을 향해 다가섰던 친근함이 표현된다. 이 책은 후자 쪽이다.


아버지가 갖고 있는 단단한 힘은 가정을 지탱하고 결속하는 뿌리로 묘사된다. 책의 첫 페이지를 읽는 순간부터 끝 페이지에서 손을 떼기 전까지 아버지라는 이름의 오해를 불식시키는 이야기는 따뜻함으로 넘쳐난다. 소설은 시골의 오래된 집에 혼자 남게 된 아버지를 돌보러 간 딸 헌이의 시선으로 펼쳐진다. 아버지는 1933년생으로 전염병이 돌던 때에 형 셋을 잃고 장남이 된 그 시대의 어려움을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자녀들과 세상을 향한 온기를 잃지 않는 감수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자신이 키웠던 앵무새의 무덤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잘 쓰지도 않는 물건들을 아내를 위해 홈쇼핑을 이용하기도 하며, 자녀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글을 배우고, 외국으로 파견업무를 가 있는 큰 아들과 편지를 주고 받기도 한다. 또한 가족에게 감사를 표현할 줄 아는 아버지다. 나아가 아버지가 마지막에 말하는 <살아냈어야>는 말은 진정으로 살아 낸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죽음이라는 자욱한 안개를 뚫고 살아 낸 아버지의 음성은 간결한 포효처럼 그 말만은 비로써 뚜렷하게 들린다.


이 책은 시대를 관통하여 대한민국의 근 현대사를 견뎌 낸 아버지에게 찬사를 보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버지가 겪어야 했던 6.25전쟁이라는 엄중한 사태 앞에서 소시민의 목숨이란 얼마나 깃털과 같은지를 보게 된다. 아버지의 군대징집을 피하기 위해 검지 손가락이 자른 기괴한 이야기들은 그 시대에 존재했던 사건들이었다. 또한 인민군과 국군 사이에서 생존하기 위해 아주 조심스러운 편 가르기에 동참해야만 했던 위험천만한 세태 속에서 기꺼이 살아냈던 아버지는 우리의 아버지였고 그렇게 살아냈음을 응시하게 한다. 이어 민주화 혁명까지 이어지는 생생한 현장에 대한 에피소드들은 시대가 겪어 내야 했던 보편적인 감응을 유려하게 표현해낸다. 소설은 마치 모든 익명의 아버지들에게 선사하는 선물상자처럼, 때로는 아버지 자신이 흘렸던 눈물자국이 뚝뚝 묻어있는 편지처럼 우리에게 배송된다.

최근에 위화의 <인생>이란 책을 읽었다. 그곳에 화자로 등장하는 푸구이라는 인물은 자신의 처량한 과거를 이야기 한다. 그는 가부장적 사고의 전형이었고, 더 나아가 가정이 붕괴하는 원인을 제공하는 주동자였다. 누구도 그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게 되어 버린 시간이 흘러 그는 자신의 삶을 자기 반성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반면에 <아버지에게 갔었어>는 아버지라는 인물은 “고맙다”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다. 마지막에 “너희들 때문에 살아냈다고 말하는 장면”은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보내는 환호와 박수처럼 도달한다. 아버지가 받아야 할 상을 도리어 가족들에게 영광을 돌리는 무대 위에 훌륭한 배역을 맡은 연기자처럼 말이다.


신경숙작가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소설 속 아버지는 우리가 흔히 소설 속에서 만난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자식에게 다정한 아버지”라고 말했다. 누군가에게 <아버지에게 갔었어>의 아버지는 전형적이지 않고 반대로 두려움의 존재일지 모르겠다. 혹은 아버지로부터 상처 입은 영혼들에겐 2차 가해를 주는 것은 아닐지 안쓰러운 마음부터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망하기로는 이 책이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읽혀 졌으면 좋겠다. 결국 나의 바램이지만. 나는 생각해본다. <아버지에게 갔었어>는 차가 웠던 마음의 온도를 높이기 위한 난로와도 같은 책이라는 것을.


결국에 이 소설은 아버지란 무엇일까라는 질문, 그리고 가족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과 연관되고, 비로써 개별자와 타자의 간격이란 건 가족을 통해 완성된다는 답에 적절하게 호응하며 운행한다. 그것이 나의 바램이자 우리의 바램이 되기를 간곡하게 소망하게 되는 책이다.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도 우리의 발걸음이 아버지에게 가기를. 그렇게 아버지에게 닿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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