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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평살이 May 04. 2021

마틴 스콜세지의 코미디의 왕(1983)을 보고

인간은 웃음을 발명할 수밖에 없었다.


마틴 스콜세지의 코미디의 왕을 보았습니다. 


많이 웃으면 웃을수록 행복해진다는 문구를 어디선가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의학적으로도 웃음은 수면 연장이나 면역력 강화, 우울감 감소등의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TV에서 방영되는 수많은 예능들은 인간의 웃음을 유발하기 위한 도구로써 사용됩니다. 그만큼 인간은 우울합니다. 마치 우울감이란 것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것처럼 항상 TV를 틀어 놓으니까요. 특히나 한 없이 우울한 날에 코미디를 보고 있으면 우울감은 싹 잊혀지곤 합니다. 그러나 코미디의 기원이 평등주의 신념의 강화, 신분계급의 부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웃음이 가볍게만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코미디의 왕이라는 영화는 인간의 광기가 정당한 수단과 관계 없이 끊임없이 질주하는 독선과 만나는 지점을 명확하게 포착해 내는 영화입니다. 그건 자연스럽게 사회구조와도 접촉되어 있는 문제의식을 반영하기도 하지요. 


주연 역할을 맡고 있는 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하는 루퍼트 펍킨은 코미디언을 희망하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나이가 34살이 된 그는 나이라는 장애물에 걸려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할까봐 노심초사하고 있었지요. 그러던 중에 코미디언의 거물인 제리 랭포드에게 접촉할 수 있는 일획천금의 기회가 다가옵니다. 그는 끈질긴 대쉬 끝에 랭포드와 다시 만날 약속을 받아내게 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는 만나주지 않습니다. 마냥 기다릴 수 없었던 루퍼트 펍킨은 랭포드의 열성팬과 계획하여 랭포드를 납치하게 됩니다. 그리고 펍킨 자신이 큰 코미디쇼에 출연할 수 있게 해달라는 방송국과의 협의 끝에 '코미디의 왕'이라는 이름으로 데뷔를 하게 되지요. 


약속과 기다림이란 플룻과 광기


이 영화는 만년 취업 준비생으로 혹독한 시대의 부름에 지쳐 있는 청년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처럼 들려지기도 합니다. 청년들의 가장 큰 고통은 언제 취업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독한 기다림이기 때문이지요. 펍킨은 월세를 내기도 힘든 가난한 환경속에서 코미디를 열심히 훈련해보지만, 그가 할 수 있는건 기다림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 기다림은 결국엔 광기가 되어 그를 더욱 유연하게 만들기까지 합니다. 루저처럼 비춰졌던 그가 그 광기로 인해 '왕'이 되어 군림하는 장면이 참 아이러니 하게 보이기도 하지요. 사회에 웃음을 공급하는 방송국은 루퍼트 펍킨이라는 한 인간의 어느 독립적인 '웃음'을 간과할 뿐더러 약속을 지키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한 명의 떼내야 하는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었지요. 심지어 제리 랭포드는 '히틀러' 또한 정당화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피력하는 대사를 합니다. '유명인'이라는 사회적 위치가 가져다주는 파급효과는 일괄적인 웃음의 재생산처럼 느껴집니다. 우선은 코미디라는 장르가 정답이 없기 때문이고, 그 트랜드를 생성해 내는 것도 상부구조에 맞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의 '전복'을 다루며, 루저였던 펍킨이 뚝심 있게 어떤 방식으로 코미디의 왕으로 군림하는 지를 해학적으로 다룹니다. 이러한 요소를 극대화 시킨 장면은 "코미디의 왕"이란 이름으로 관객들앞에 처음 개그를 선보였을 때라는 건 참 흥미롭습니다. 특히 이전에 코미디의 왕이었던 제리 랭포드가 납치 되었다는 사실을 말했을 때, 관객들이 무엇보다 더 큰 환호와 박수를 치고 있는 것은 참 아이러니이지요. 이제는 펍킨의 광기에 매료된 관객들이 민중이 되어 새로운 코미디의 왕을 다시금 세우고 있다는 사실은 시대의 전복을 잘 반영하여 표현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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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2019년도에 개봉된 조커의 오마주로 유명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택시 드라이버와 코메디의 왕의 장면들을 적절하게 연출했다고 감독이 공언한 적이 있지요. 그만큼 인간의 광기의 출발선이 어디인지를 돌아볼 수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우린 마냥 웃을수가 없게 되지요. 펍킨이 마지막에 펼치는 개그는 개인의 아픔이기도 하지만, 가난의 고초에서 쓸쓸하게 버텨내고 있는 서민들의 애환이기도 하거든요. 어찌됐든 웃음은 불행과 불안과 고독이 가중될 수록 흥미롭게도 웃어야 할 의미가 생기는 거니까요. 니체의 말을 한번 떠올려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웃어보자구요.


인간만이 이 세상에서 깊이 괴로워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웃음을 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불행하고 가장 우울한 동물이 당연히 가장 쾌활한 동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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