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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평살이 Apr 24. 2021

장 뤽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1965)를 보면서

이성과 정념의 파노라마


장 뤽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를 보았습니다. 


고다르의 그나마 대중적인(?) 걸작으로 평가 받는 이 영화는 이성과 정념의 대립을 이미지로 나타내는 듯 합니다. 등장인물인 마리안과 페르디낭의 대화는 이러한 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지요. 가령 마리안은 페르디낭에게 '단어'로 말한다는 말을 하고, 자신은 느낌으로 바라본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마리안은 지속적으로 '감정'에 대한 노래를 하거나 자신을 '감정'적인 여자라고 표현하지요) 실상 <느낌>이란 건 선험적인 정보로 즉각적, 혹은 개인적이며, 지극히 '감정'적으로 바라보는 어떤 한 관점을 뜻하고, 반면에 <단어>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완결형의 시선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 등장하는 영혼을 전투형 마차를 비유한 것과 유사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전투형 마차를 통치하는 것은 이성, 즉 논리를 상징합니다. 이 말 중에서 말을 듣지 않는 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감정', '정념'입니다. 


"삐딱하고 느릿느릿 움직이는 그 동물은 (...) 회색 눈에 피처럼 붉은 안색을 하고 있으며 (...) 채찍과 박차를 가해도 여간해서 말을 듣지 않는다."

플라톤은 정신의 삶이란 이성과 정념 사이의 전쟁이며 우리는 그 전쟁에서 자주 패배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즉, 영화에서 결국에 이성이라 칭할 수 있는 페르디낭은 감정인 마리안과의 전쟁속에서 패배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페르디낭은 마리안을 죽이게 되고, 결국 자기도 자살이라는 선택을 하게 되니까요. 물론 이 뿐만 아니라 사랑이라는 도달할 수 없는 간격 사이에 영화가 말하고 싶은 다채로운 이야기도 존재합니다. 정치적 폭력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대표적으로 베트남의 이야기를 근거로)등의 문제 제기를 곳곳에 배치함으로써 사회에 속한 인간의 정체성, 실존을 유심히 들어다 보게 되지요. 차처하고 이는 결국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귀결되어 있습니다. 서두에 파티에서 만난 어느 영화 감독에게 페르디낭은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고, 미국감독인 그 사람은 통역을 통해 그 정의를 전달 받게 되지요. 이렇게 말합니다.

"영화는 전쟁 같은 거래요. 또한 사랑이며, 증오이고, 행동이며, 폭력이고, 죽음이래요. 한 마디로 감정이래요"


페르디낭이 알아 듣지 못하는 영어는 통역되어 뜻이 지연되는 효과가 이어지며, 이 지연은 해체 될 수 없는 언어로 규정되는 '감정'이라는 위력 앞에 능동적인 개체가 되어 뜻 없이 배회하는 시적 가능성으로 회귀하게 됩니다.  이 영화는 '감정'적인 합일이 우선시 되는 영화이며, 난대 없이 등장하는 글 쓰는 장면, 전광판, 누군지 모를 초상화들, 원색 계열의 배경들은 감독의 의도에 적합하게 시적인 리듬으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제작 과정에서 흥미로운 점은 쓰여진 시나리오가 없었다는 점과 영화를 잃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시적 리듬을 고집했다는 점이라고 합니다. 휠덜린이 이전에 고백 했듯이 '인간은 시적으로 거주한다'든지, '해석되지 않은 채 하나의 표지로 있다'라는 그 언구들에는 인간이 정처 없이 언어를 유영하고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것은 바로 느낌이자, 감정, 뭐 그런 거겠지요. 영화로 음미할 수 없는 상상의 깊이를 고다르는 기어코 이미지의 묶음들로 자신을 폭파하면서까지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미치광이 고다르. 그 자신이 듯이 말이지요.


"당신은 나에게 단어로 말하고"

"나는 당신을 느낌으로 바라보니까요" 

"당신하고는 대화가 불가능해"

"생각은 없고 느낌뿐이지"

"틀려요! 느낌이 생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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