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붙고 신입생 OT를 가기도 한참 전, 나는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즈음 내가 좋아했던 것은 무료함을 즐기며 그저 누워 있는 것이었는데, 보다 못한 친구는 나를 여기저기 끌고 다니며 세상 구경을 시켜줬더랬다. 그때쯤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다다이즘을 주제로 마르셀 뒤샹 展이 한창이었다. 오랜 시간 굳어있던 다리 근육들을 차차 풀어가며, 영화과 입시 때 배웠던 다다이즘을 친구에게 설명해주면서 전시장을 둘러보고 나왔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애써 꾸미고 나온 게 공연히 머쓱해서, 저녁 무렵까지 다른 전시도 보기로 했다.
발길 가는 대로 들어간 한 전시회장에서 우리는 김성삼 작가를 마주치게 되었다. 얼떨결에 사진까지 찍게 된 우리는 전시 도록을 펼쳐 사인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마지못한 척 사인을 해주던 김성삼 작가는 내 전시 도록에 이렇게 적어주었다.
시간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간이 있다
나는 이 말을 되새김질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대체 무슨 뜻일까, 생각했었다. 이 말을 잊은 지도 한참이 되고, 일 년의 시간이 지난 뒤 교양 목록을 보다 눈에 걸린 과목이 있었다. 인간과 시간. 당최 시간이 뭐 길래. 수강신청을 했다. 그리고 지금 와서 작가가 써주었던 예의 그 문장을 적확한 개념을 넣어 생각해 보았다. 캔버스에 유화를 덧대는 시간, 그 시간 속에 예술이 있고 또 예술은 시간을 지나면서 빛을 발하게 된다. 뭐 이런 뜻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순환적 시간관이고 직선적 시간관이고 나에게는 어렵다. 사실 당연하다. 시간은 인간이 만들어내지 않았고, 그저 명명하면서 의미를 갖게 된 것뿐이다. 시간이라는 건 허상일 뿐,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강의를 들으면서 알게 된 수많은 철학과 사유를 거쳐 시간이라는 개념을 대강은 알게 된 것도 같다.
나는 사실 시간이라는 것을 증오해왔다. 살면서 행복했거나, 무던했던 시간보다 괴롭고 헛헛했던 시간이 더 많았다고 생각했었다. 니체의 영원회귀를 공부하면서 느꼈던 회의는 여기서 비롯한다. '나는 순환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니체 씨. 내 인생은 그냥 여기서 끝나도 됩니다!' 이렇게 속으로 여러 번 외쳤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글로 내 생각과 개념들을 써 내려가면서, 어떤 상념들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음, 생각해보니까 강의 시간에 들려주셨던 음악들 나도 좋아하는 곡이었는데. 생각난 김에 들으면서 써야겠다.’ 이거다. 들었던 노래를 다시 듣는 것 또한 인생 속 사소한 순환이라고 갖다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틀렸다고 해도 괜찮다. 나는 이러한 잡념들로 인해 인생의 영원회귀를 긍정할 만한 이유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내가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또 다양한 일들을 하며 보내는 시간들이 사실 헛된 것만은 아니었음을. 그리고 또 이러한 시간이 무수히 반복되고 다시 되돌아왔을 때, 나에게는 커다란 의미가 될 것임을 나는 알게 되었다. 시간이라는 어렵고 고차원적인 개념으로부터 인생의 단순한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이다. 교수님의 말마따나, 우리는 삶과 죽음이라는 시작과 끝보다는 그 안의 과정 속에서 의미를 찾는 것 아닌가?
어쨌거나 나는 이제 시간을 긍정한다. 나와 인생이라는 차안의 세계로부터 시간이라는 피안의 세계까지. 이 안에서 어떻게든 잘 살고 잘 죽을 것을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