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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타치는 사진가 Feb 03. 2022

[아재 라떼 공방 #4] 첫 갈림길

스프레드 시트에서 데이터베이스로

93년 가을 천리안은 가입자 10만을 넘긴다. 이를 기념한다고 사업본부 전원이 캔맥주 하나씩을 들고 간단히 자축파티를 했다. 로터스 123과 디베이스 3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서 해외 서비스, 주로 미국의 컴퓨서브, 프로디지 등을 들여다보며 벤치마킹을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의를 다녀온 과장이 부른다. 

"큰 숙제가 하나 떨어졌네. 고생 좀 해야겠어."

"뭔데요?"

"탑 화면을 바꿔 보라는군."


탑 화면이라는 게 천리안에 접속하면 뜨는 첫 화면이다. 화면 하나만 바꾸는 게 아니고 그 안에 들어있는 모든 서비스의 구성을 재편해야 하는 일이다. 메뉴 화면을 다 모으면 4,500개 정도 되니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IP가 제공하는 서비스 하나라도 빠뜨리면 이 역시 큰 사고. 


고민 끝에 일단 첫 화면 구성안을 만들어 컨펌을 받았다. 피씨 서브와 천리안 2가 통합되면서 기계적으로 나뉘어 있던 서비스들을 커뮤니티/콘텐츠/커머스 세 그룹으로 3단으로 구성했다. (천리안이 탑 화면을 바꾼 후 하이텔과 나우누리도 비슷하게 따라오게 된다.) 


문제는 그다음. 수백 개에 달하는 하위 화면들을 죄다 문서로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고, 손으로 메뉴를 배치하다 보면 빠뜨리는 아이템도 있을 수 있다. 이 때다 싶어 클리퍼라는 프로그램을 사용해 보기로 했다. 클리퍼는 간단히 말하면 dBase3 같은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의 UI를 전문적으로 만들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일상적인 메뉴 관리를 위해 모든 서비스가 dBase3로 관리하고 있었으니 여기에 연결하여 새로운 메뉴체계를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기능을 클리퍼로 작성했다. 변경되는 메뉴 화면을 모두 인쇄하고 클리퍼로 만든 프로그램을 실행파일(*. exe)로 만들어 각 부서로 돌렸다. 부서별로 각자 PC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고 수정사항을 보내왔고 최종본을 만들어냈다. 


“저… 그 프로그램 소스 좀 줄 수 있어요?”


운영팀의 K 대리가 내 자리로 찾아왔다. 


“화면 갈무리하시면 될 텐데 소스까지 필요하세요?”


“갈무리하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을 것 같고, 화면이 너무 많아서…”


잠깐 망설였다. K 대리 때문에 밤새워 수작업했던 생각이 났다. ‘골탕 좀 먹여봐?’


“카피해서 드릴게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K 대리가 클리퍼 소스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이 이후 운영팀에 일을 부탁하기가 훨씬 수월해진 건 사실이다. 


한 번 만들어둔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은 이후에도 유용하게 사용했다. 새로운 서비스가 추가되거나 개편안을 만들 때마다 간단하게 시안을 만들어 볼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클리퍼 가지고 좀 더 기능을 업그레이드시켜 보겠다고 밤에 남아 코딩을 하고 있었다. 개발팀 J 과장이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말을 건다. 


“니 집에 안 가고 머하노?”


“어? 예~~ 기능 좀 붙여보고 있어요.”


“그기 재밌나?”


“재밌으니까 남아서 이러고 있죠.”


“그랄 꺼믄 여기서 이라지 말고 개발팀으로 오그라.”


“예?”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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