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민방위대원 불을 꺼라
1990년 11월 15일 등화관제 훈련이 종료된 날이라고 한다.
등화관제는 아저씨들이 저녁에 민방위 모자와 완장을 차고 삼삼오오 아파트를 돌아다니면서 불 꺼라를 외치던 날이었다. 왜 불을 꺼야 하는지는 나중에 들었고 -무시무시하게도 적의 폭격대비-모처럼 일찍 집에 들어오신 아버지는 이른 저녁을 드시고 민방위 완장과 머리에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민방위 모자를 쓰시고 서둘러 집을 나서셨다.
온 동네 아저씨들이 일찍 귀가해서 골목마다 가득 찬 광경은 괜스레 우리 아빠가 어디에 있나 찾으며 졸졸 따라다니는 어린아이들과 비슷비슷한 남자들이 엉켜 시장통 같은 들뜬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내 기억속의 등화관제는 골목마다 출석부처럼 아저씨들이 참석했다는 명단을 확인하는 과정과 엄청 시끄러운 '이~~이잉잉 삑'으로 시작되는 빨간 스피커의 새된 소음 소리, '아,아 하나 둘 하나 둘'을 여러번 말하다가 모이세요 줄서세요 이리가세요 저리가세요 를 외치는 대장아저씨의 짜증이 들리는 소음의 연속이었다.
일제히 시간이 되어 온 동네 아파트의 불이 꺼지고 아저씨들은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는 광경은 너무 신나고 재미있어서 두 살 아래의 동생과 나는 방안의 불을 켰다가 껐다가 장난을 치면서 000호 불 꺼라를 같이 외치며 낄낄거렸다.
무전을 친다고 방안의 불을 열심히 켰다 껐다 하면서 등화관제에 동원된 아저씨들과 숨바꼭질하듯 밀당을 하는데 오빠가 너희는 큰일이 났다고 경찰이 오고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오빠는 나무 아래 숨어있다가 담뱃불로 신호를 보내서 잡혀갔다는 사람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우리가 방의 불을 켜서 비행기를 보내 폭격을 하려는 북한과 연락한다는 이유로 잡혀갈거라고 겁을 주었다. 동생과 나는 거짓말인지 알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경찰이 찾아와서 잡아가면 어떡하나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밖에서 갑자기 무서운 아저씨가 장난치면 올라오겠다고 소리를 질러서 이불속으로 숨어버렸다. 아저씨는 올라오지 않으셨지만 간첩이 아니데 잡혀가면 어쩌나 불장난하지 말 걸 하며 무척이나 후회를 했다. 한꺼번에 불이 꺼지고 약속된 시간 사이렌이 울리기까지 유지해야 하는데 끝까지 불을 끄지 않고 말을 안 듣는 곳은 민방위대원들이 올라가 초인종을 누르고 불을 끄라고 실랑이를 벌이고는 했다. 지금이라도 철없던 우리의 행동에 대한 죄송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 속에는 우리 아빠도 계셨을텐데.
달마다 집집마다 순번을 돌아가면서 반상회를 할 때면 시끌벅적 동네 사람들이 모여 과일이나 떡 등 간식을 둘러 앉았고 그 달의 건의사항을 반장 아주머니가 전달했다. 먹고 이야기를 하느라 건성건성 듣는 사람들에게 반장 아주머니는 목소리를 높여서 등화관제 때는 불 잘 끄라는 협조의 당부를 잊지 않았다.
민방위는 마지막이라 이제 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시던 아버지는 시원보다는 섭섭해하셨는데 이제 민방위도 안 하는 나이가 되었나 혼잣말을 하시는 것을 들었다. 뒤늦게 귀가를 하면서 아저씨들이 삼삼오오 술을 기울이거나 모처럼 차 한잔을 마시고 헤어졌었던 시간이 그리우셨던 것이 아닐지 짐작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