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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지 Sep 18. 2021

<퓨어> 망한 섹스 이후

관계를 회복하는 법

* 스포일러 경고

<퓨어>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퓨어>는 현재 왓챠에서 볼 수 있어요.



어찌어찌 일이 벌어졌지만 그들이 ‘FWB’가 되지는 못했다. 프렌즈 위드 베네핏츠, 즉 섹스까지 가능한 친구가 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 시점에서 찰리(조 콜)는 발기 부전이다. 찰리와 우발적으로 섹스하게 됐다가 그의 문제를 알게 된 마니(찰리 클라이브)는 괜찮으니까 안 해도 된다고 말하지만, 찰리는 혼자 있고 싶다면서 마니에게 집에 가라고 벌컥 화를 낸다. 그런데 마니는 애초에 섹스를 하려고 찰리의 집에 간 것이 아니다. 친구의 울적한 마음을 달래주러 갔다가 자기 연민에 빠진 못난 남자한테 쫓겨난 신세가 되었다.    


딱 이 상황만 봐서는 찰리가 참 졸렬하기 짝이 없겠지만, 사실 이런 갈등이 있기 전까지 충분한 맥락이 있었다. 그는 포르노 중독이다. 그가 이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꽤 애를 썼다는 사실을, 중독자 모임에서 만난 마니도 잘 알고 있다. 찰리는 1년 동안 포르노를 보지 않았다. 술을 마시면 더 큰 충동에 시달린다는 것을 인지하고 술도 끊었고, 꾸준하게 중독자 모임에 나갔으며, ‘클린’해지기 전까지 여자친구 플로라와 거리를 두기로 했다. 그렇게 1년을 보낸 끝에 찰리는 플로라와 재회할 준비가 됐다고 확신했지만, 1년은 긴 시간이다. 찰리가 중독에서 마침내 벗어나기까지 필요했던 시간이자 플로라에게 찰리 이상으로 중요한 사람이 생기고도 남을 시간이다. 플로라가 ‘전 여친’이 되었음을 깨달은 날, 찰리에겐 위로가 절실했고 멀지 않은 곳에 친구 마니가 있었다. 그렇게 둘이 만나 부둥켜안고 슬픔을 나누다가 돌연 섹스를 하게 된 것인데, 정서적으로 꽤 위태로웠던 그날부터 찰리에게 성 기능 장애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이 갑작스러운 문제로 인해 찰리는 1년 만에 하는 섹스에 실패하고 우정마저 위태롭게 만든 것이다.



찰리의 발기 부전은 신체적인 문제지만 기원을 따져보면 이것이 정신적인 문제, 즉 포르노 중독이라는 강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둘은 알고 있다. 그런 찰리는 사과의 중요성을 잘 아는 사람이다. 질환의 성격이 좀 다르긴 하지만 역시 섹스와 관련된 강박에 사로잡혀 있기에 많은 일을 그르치는 마니도 마찬가지다. 관계 문제 해결의 시작은 사과라고 찰리가 일찍이 알려준 바 있고, 그의 조언을 참고해 제대로 실행해본 적도 있어서다. 즉 찰리와 마니에겐 해결이 어려운 비슷한 문제가 있고, 둘은 중독자 모임에서 만난 데다 사과의 가치를 잘 아는 만큼 문제 개선 의지가 강하다. 그렇게 약점을 공유하면서 변화를 추구하는 발전적인 사이라면 어긋나는 일이 생겨도 관계 회복을 낙관할 수 있다. 찰리는 그날 밤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마니 또한 이를 잘 받아들인다. 이제 둘은 각각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둘이 겪는 질환이 없는 가까운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곧 찰리에게 새로운 사람이 생긴다. 찰리보다 스무 살 이상 많아 보이는 직장 상사 세라(둔 마키찬)다. 세라는 찰리에게 마치 덮치듯 위계적인 키스를 시도한다. 찰리는 이를 처음에는 거부하는데, 직장 상사인 데다가 나이도 많은 세라가 부담스럽다거나 싫어서가 아니다. 나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 그래서 호감을 갖게 된 사람이 생겼다는 건 나의 비밀스러운 약점을 두려운 마음으로 다시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찰리는 상호 만족할 만한 섹스를 하지 못한다. 섹스가 모두에게 필수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관계 진전의 강력한 증거로 볼 수 있는 자연스러운 교감 행위일 것인데, 그에게 섹스는 자신의 문제를 잘 아는 사람과도 순조롭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곤란을 잘 아는 마니는 찰리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면 자신의 약점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것을 권한다. 찰리는 친구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세라에게 사실을 말하기로 한다.     


그가 세라에게 사실을 말하는 방식은 꽤 정교하다. 단계적이며 구체적이라는 뜻이다. 그는 마니에게 했던 짓을 반복하지 않는다. 세라를 찾아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지난 일을 스스로 돌이키고, 이어서 약속을 잡고, 약속 당일에는 분위기를 망치지 않는다. 마침내 섹스할 만한 정황이 갖춰졌을 때는 자신에게 신체적인 문제가 있다면서 이런 말을 듣고도 함께할 마음이 있다면 자긴 도움이 필요한 상태니까 도와달라고 간절한 눈빛으로 말한다. 세라도 납득해 섹스를 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진정성 있는 소통이 장기적인 관계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것을 나쁜 작별로 볼 수는 없다. 찰리는 여전히 구강성교만 가능한 상태로 보이고, 세라는 실험적이고 다채로운 섹스를 원한다. 세라의 욕구는 크고, 이를 충족할 능력이 없는 찰리는 세라의 결단을 수용한다. 둘은 뜻이 달라서 함께할 수 없다는 걸 일찍 깨닫고 돌아선 것이지 어느 한 쪽이 불쌍하거나 불편한 채로 관계를 끝낸 것이 아니다.     




<퓨어>에서 찰리를 둘러싼 이 섹스 관련 에피소드는 사실 부차적인 이야기다. 작품의 주인공은 찰리가 아니라 마니고, 둘이 겪고 있는 문제는 성에 관한 OCD(obsessive-commpulsive disorder, 강박 장애)로서 찰리가 포르노 중독이라면 마니의 세부 증상은 사람을 마주할 때마다 그 대상이 부모든 친구든 의료인이든 간에 지나치게 음탕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마니의 이상 강박은 상대에게, 나아가 일에 집중을 못하는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 작품의 원작자인 소설가 로즈 카트라이트의 실제 경험에서 출발한 <퓨어>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해결하려 노력하는 과정을 다룬다.      



찰리는 마니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던 길에서 만난 친구다. 찰리는 부유한 가정에서 멀쩡한 얼굴로 태어나 번듯한 직업을 가지고 살지만, 포르노 중독이라는 남부끄럽고 심각한 강박증으로 직장을 휴직하고 애인과 거리두기를 하면서까지 문제를 교정하려 분투하는 중이다. 개선 과정에서 그가 접한 취미 하나는 펠트다. 가느다란 섬유를 인내심 있게 엮어 인형을 만드는 것인데, 생각을 딴 데로 돌리려고 해본 건데 찰리는 손재주까지 제법 좋다. 친구 마니의 증상을 진지하게 여기고 도서관에서 책을 뒤져 병명을 처음으로 알려준 사람도 찰리다. 둘의 실패한 섹스는 강압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어서 찰리가 세라와 한 섹스는 기술적으로 좀 미흡했을지언정 누가 봐도 수긍할 만한 소통의 절차가 있었다. 즉 찰리는 그에게 포르노 중독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싶을 만큼 사실상 조금도 해롭지 않은 남성이다. 이것이야말로 작품이 전하고자 한 핵심적인 문제의식이다. 정신 질환이란 드라마틱한 광인의 이야기로 한정될 수 없다. <퓨어>는 우리 곁에서 함께하지만 이해받기 두려워 마음의 고통을 삼키는, 꽤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작품의 시선은 꽤 성숙하고 세련된 편이다. <퓨어>는 섹스에 관한 강박이라는 선정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게 수준 낮고 음침한 망상이 아니라 원만한 인간관계 유지를 어렵게 하는 심각한 질병이라는 엄중한 인식을 바탕으로 쓰고 연출한 작품이다. 직접적인 노출과 좀 과한 성행위 묘사는 있지만 그 수위와 관점은 그리 지저분하지 않다. 이런 야한 장면들은 보는 사람에게 시각적인 자극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로 인해 고통받는 마니의 혼란스러운 상태를 전달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미덕은 입체적인 캐릭터 구축과 그들 간의 촘촘한 관계 설계다. 곁다리로 풀어놓은 찰리의 섹스 일화가 그 예로, 이 일화가 가리키는 것은 작품 전체를 가로지르는 주제와 같은 선상에 있다. 관계는, 특히 사랑은,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이런 진실한 소통으로 우리는 계속해서 나아간다. 섹스라는 상호작용 또한 그래야 한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합의를 생략하는 관계는 작품은 물론 현실에서도 너무나 많고, 작품이 전하는 이런 당연한 이야기가 결국 당연하지 않은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찰리의 이야기로 인해 내가 친구한테 들은 망한 섹스설이 떠올랐다. 적당히 ‘썸’을 타다가 자게 됐는데 1초 만에 삽입이 끝났다. 1초 만에 끝내고 돌아누운 상대는 그때부터 말이 없었고 그날 이후로 그의 연락은 전과 같지 않았다. 자기 전까지만 해도 매일매일 서로의 스케줄을 공유하는 사이였는데. 갑자기 무심해진 반응을 통해 그가 자신에게 무엇을 기대했는지를 친구는 깨달았다. ‘1초 만에 끝낸다고 해도 얘는 나를 이해해줄 여자인가?’ 나의 친구는 현명한 사람이라 1초짜리 섹스 이후의 반응으로 여친의 됨됨이를 판단하는 모자란 인간을 남친으로 두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면, 거기에 농담을 좀 얹어 그가 곤란이라 여기는 상황을 같이 웃을 수 있는 상황으로 바꿔놨다면 관계를 좀 더 고려해봤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대단한 말도 아니다. ‘어 나 원래 이래.’ ‘아 나 왜 이러지.’ 내 친구는 이런 말조차도 못 하는 상대랑 잔 것이다.


애정 관계에 있어 섹스가 필수라는 주장을 할 마음은 없다. 그치만 그건 상대의 성품을 파악하고 관계 진전을 결정할 초기 근거 자료를 확보하는 데 있어서는 꽤 효과적인 행위인 것 같다. 섹스는 삽입 가능한 시간만으로 내용을 평가하기엔 매우 부족한, 아주 내밀하고 깊숙한 교감 활동이기 때문이다. 어떤 교감을 했느냐에 따라 우리는 섹스 이후 상대와 더 멀어질 수도, 더 가까워질 수도 있다. 내 친구의 기대처럼 한계나 실수를 털어놓는 것으로 소통을 위해 노력한다면 1초 따위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있다. <퓨어>의 발기 부전 찰리가 그랬던 것처럼 잘못된 대응을 복기하면서 문제를 덮어두지 않고 도움을 청하는 방법도 있다. 그런다고 모든 것이 무너지는가? 실험적이고 다채로운 섹스를 원하는 세라 같은 사람도 있지만, 삽입 섹스가 과대평가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는 나나 친구 같은 사람도 있다. 우리는 애정 관계에 있어 통상적인 성행위 말고도 솔직한 대화를 원한다. 나만의 문제가 우리의 문제로 확장되는 순간을 사랑하고, 해결하거나 대안을 찾기 위해 함께 노력할 때 신뢰는 더욱 공고해진다고 믿는다. 이런 유대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토대일 것이며 이런 경험이 우리를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이런 과정 없이 섹스를 정복으로 여기는 진부한 성별 논리에 의해 관계가 장악되는 순간, 망한 섹스는 애처롭고 우스운 ‘썰’로만 추락할 뿐이다.


망한다고 망신만 당하는 것은 아니다. 망하면, 우리는 더 많이 배운다. <퓨어>는 강박 장애의 전말을 섬세하게 그리면서도 잠깐 짬을 내서 망한 섹스를 제시하고, 이걸 우스꽝스럽고 수치스러운 경험으로만 치부하지 않으며 가장 부끄러운 섹스와 올바른 섹스가 무엇인지를 돌아볼 기회를 준다. 그렇다고 가장 이상적인 섹스에 대해 명확한 답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에 대해서 논한다. 안전하고 행복하게 섹스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이가 있다면 우리는 어떤 가치를 공유하고 추구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의 관계는 강하고 잘하는 것에 대한 찬미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적 욕구와 그 충족 여부 또한 관계의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단순하게 살아가지 않는다. 너의 약함과 슬픔을 발견하고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확대하는 순간, 우리는 다음을 향해 함께 빛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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