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야 알았다.
그토록 정의롭다고 믿었던 말들이, 사실은 또 다른 권력의 언어였다는 것을.
민주를 부르짖고, 평등을 외치며, 다름을 인정하자던 그들의 말은 처음엔 신념처럼 들렸다.
나 역시 그들의 언어 속에서 진실의 조각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깨달았다.
그들의 ‘진보’는 언제나 자기들끼리의 세계 안에서만 유효했고,
그들이 말하는 ‘자유’는 오로지 그들의 해석으로만 허락되었다는 사실을.
그들의 회의 자리에서, 강단에서, 방송과 글 속에서 나는 반복되는 위선을 보았다.
모든 대화는 결국 자기 확인의 의식이 되었고, 토론은 신앙의 설교가 되었다.
다른 견해를 말하는 이는 순식간에 ‘무지한 자’, ‘수구’, ‘뉴라이트’로 낙인찍혔다.
그들의 세계는 그렇게 단순했다. 선과 악이 명확히 나뉘어 있었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자기 자신들’이 있었다.
나는 처음엔 그것을 열정으로 착각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불타는 신념이 필요하다고 믿었으니까.
그러나 그 불길은 세상을 밝히기보다 타인을 태우는 데 쓰였다.
그들의 언어는 점점 거칠어졌고, 그들의 정의는 점점 좁아졌다.
결국 그들의 ‘민주’는 배타의 언어가 되었고, ‘평등’은 위선의 포장지가 되었다.
그들의 미소는 잔인했고, 그들의 포용은 폭력이었다.
히틀러가 그랬고, 모택동이 그랬으며, 스탈린이 그랬고, 김일성이 그랬다.
그들은 모두 인민을 위한다는 이름으로 권력을 쥐었고, 정의를 말하며 폭력을 정당화했다.
그들의 언어는 달콤했으나, 그 뒤편에는 피비린내 나는 침묵이 있었다.
‘대중’이라는 이름의 무리들이 환호할 때마다 한 사람의 자유가 꺾였고,
‘혁명’이라는 구호가 울릴 때마다 또 한 명의 진실이 묻혔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그들의 독재가 아니라, 그 독재를 가능하게 한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길 멈췄고, 지도자의 언어를 신의 계시처럼 받아들였다.
진실보다 달콤한 것은 언제나 ‘소속감’이었다.
이념은 그들에게 현실을 대신해 주었고, 사상은 죄책감을 면제해 주는 면허가 되었다.
나는 그것이 단지 과거의 일이 아니라고 느낀다.
그들의 그림자는 여전히 살아 있다.
이제는 군복 대신 양복을 입고, 권총 대신 펜을 들었으며, 연단이 아니라
방송 스튜디오와 인터넷 속에 숨어 있다.
그들은 여전히 정의를 말하고 민주를 외친다.
그러나 그들의 말끝에는 언제나 선 긋기가 있다.
우리와 그들, 깨어 있는 자와 잠든 자, 옳은 자와 틀린 자.
그 구분이 생겨나는 순간, 역사는 다시 어둠으로 미끄러진다.
나는 오래도록 그 세계 안에 머물렀다.
그들의 논리와 말투를 익혔고, 그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판단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거울 속의 나를 보고 놀랐다.
나는 내가 가장 경멸하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념의 옷을 입은 또 하나의 위선자, 정의를 말하면서도 타인의 자유를 두려워하는 인간.
그때 나는 깨달았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다른 진실’이 아니라,
그들의 진실이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었다는 것을.
그들은 세상을 속이기 전에 이미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떠났다.
그들의 세계에서, 그들의 언어에서, 그들의 믿음에서 벗어났다.
그날 이후 나는 어떤 진영에도 속하지 않으려 애썼다.
진보도, 보수도, 중도도 아닌, 단지 스스로 생각하는 한 인간으로 살고자 했다.
사람들은 내게 물었다.
“그래서 너는 어느 편이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이제 편을 들지 않는다. 편을 드는 순간, 또다시 누군가의 거짓을 대신 말하게 되니까.”
그들의 민주주의는 결국 ‘우리의 민주주의’였고,
그들의 평등은 ‘우리 안의 평등’이었다.
그들의 세상에서 타인은 언제나 도구였고, 진실은 연출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만든 무대 위에서 서로를 칭송했고,
관객이 박수를 치지 않으면 분노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사회는 점점 더 폐쇄적인 동아리가 되어갔다.
그들의 민주는 언제나 ‘민족’ 속에 있었다.
그들의 평화도 ‘민족’의 이름으로 포장되었다.
그들은 개인의 자유보다 집단의 신화를 택했고, 사유보다 혈통을 숭배했다.
오로지 ‘통일’만이 지상과제라는 허구로 세상을 유린하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인간의 생을 희생시켰다.
민족이란 이름 아래 사라진 건 타인의 생명만이 아니었다.
생각하는 인간, 느끼는 인간, 자유로운 인간이 그들의 구호 속에서 서서히 말라갔다.
나는 이제야 알았다.
그 모든 거창한 말들이 사실은 인간을 부정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을.
그들의 민주와 평화, 그리고 통일의 신화는 결국 패거리의 오래된 잔인한 놀이였다.
그들의 세계는 인간에 대한 반역이었고, 생명에 대한 모독이었다.
그들의 오랜 짓은 반인륜적이었고, 동시에 반자연적이었다.
이제 나는 그들의 언어가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얼마나 교묘하게 인간의 양심을 마비시켜 왔는지를 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그들의 신화를 믿지 않는다.
그들의 모든 외침과 주장, 그리고 스스로의 도덕적 우월감은
자신들의 패거리를 한 명 더 만들기 위한 나르시시즘 —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폐악질의 세월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세월을 더 이상 동조하지 않는다.
그들의 언어에서 벗어나, 나의 침묵 속에서 진실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