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침몰 직전에 있지 않다. 이 점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러나 순항하고 있다고 말하기에도 주저되는 상태에 들어선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파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배는 여전히 떠 있고, 엔진도 돌아가며, 항해 장비도 갖추고 있다. 하지만 나침반이 흔들리고 있고, 항로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서서히 붕괴되고 있다.
국가의 위기는 대개 붕괴의 순간이 아니라 이탈의 순간에서 시작된다. 항로 이탈은 폭발이나 쿠데타처럼 극적인 장면을 동반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책 하나, 언어 하나, 판단 하나가 누적되며 조용히 진행된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아무도 위기라고 부르지 않는 동안, 국가는 이미 다른 바다로 접어든다. 훗날 역사가 돌아보면, 바로 그 지점이 분기점이었다는 사실만이 남는다.
자유대한민국의 항로는 분명히 설정되어 있었다. 법치, 자유시장, 책임 있는 민주주의, 그리고 개인의 자유를 전제로 한 공동체. 이 항로는 특정 세력의 이념적 산물이 아니라, 냉혹한 현실 속에서 내려진 역사적 선택의 결과였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해야 했던 국가는, 생존을 위해 이상보다 제도를 택했고 감정보다 질서를 우선했다. 자유는 선언이 아니라 시스템으로 구축되었고, 민주주의는 열망이 아니라 절차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지금 이 항로는 명시적으로 부정되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희석되고 있다. 자유는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관리의 대상으로 바뀌고, 시장은 조정의 대상이 아니라 의심의 대상으로 전환된다. 국가는 책임의 주체라기보다 모든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는 거대한 보호자로 재정의된다. 개인의 판단과 선택은 존중의 대상이 아니라 교정의 대상이 되고, 실패는 책임이 아니라 구조의 탓으로 환원된다. 이 변화는 혁명처럼 급진적이지 않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조용히 진행되며, 되돌리기 어렵다.
정치 언어는 이 이탈을 감춘다. “포용”, “공정”, “안전”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옳아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단어가 아니라 그 단어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 언어들은 종종 결정의 회피, 책임의 분산, 비용의 미래 전가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장기적 부담은 다음 정부로, 다음 세대로 미뤄지고, 현재의 불편과 위험을 말하는 쪽은 비현실적이거나 냉혹한 집단으로 낙인찍힌다. 이렇게 해서 항로 이탈은 공개적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암묵적 금기의 영역이 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이탈이 특정 진영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보수는 자유와 시장을 말하면서도 구조 개혁의 정치적 비용을 감당하지 않았고, 진보는 정의와 분배를 말하면서도 지속 가능성과 재정의 한계를 외면해 왔다. 어느 쪽도 항로를 명확히 재확인하기보다, 단기적 안정을 택하거나 갈등을 회피하는 선택을 반복했다. 그 결과 국가는 속도는 유지한 채, 방향만 흐려진 상태로 항해하고 있다.
항로 이탈을 인식한다는 것은 비관을 선언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대한민국은 여전히 안전하다”는 자기 위안도, “모든 것이 끝났다”는 허무주의도 아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벗어났는지,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지, 무엇을 반드시 회복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말하는 것이다. 진단 없는 낙관은 무책임이고, 진단 없는 절망은 도피에 불과하다.
국가는 감정으로 운영되지 않는다. 분노나 연민, 도덕적 우월감은 정책의 기준이 될 수 없다. 방향 감각을 잃은 낙관은 가장 위험한 상태다. 대한민국호는 아직 선택할 수 있다. 제도는 남아 있고, 인적 자원도 살아 있으며, 회복의 시간도 완전히 소진되지 않았다. 그러나 선택의 시간은 무한하지 않다. 항로 이탈을 인식하지 못한 채 계속 나아간다면, 우리는 언젠가 침몰이 아니라 도착해서는 안 될 곳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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