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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라 Jan 21. 2021

내면아이

Inner Child : 행복한 부모가 행복한 아이를 키운다

내가 왜 이러지? 

그렇게까지 예민하게 굴지 않아도 됐는데.


스스로가 낯 설정도로 발끈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는데 어떤 특정 부분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나도 모르게 좀 더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는 순간. 상대방이 그런 의도로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걸 알아서 화를 내지는 않지만 마음 한 켠이 불편해오는 순간. 그런 순간들 말이다. 마치 빨간 버튼 하나가 우리 안에 있기라도 한 듯, 어떤 부분을 건드리면 갑자기 기분이 널뛰기를 시작한다. 


오고 가는 우리 모두 안에 있는 것


Push the button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상담을 하다 보면 부모상담에서 "Push the button"이라는 표현을 많이 듣게 된다. 말의 뉘앙스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아이들이 누르지 말아야 할 버튼을 눌러서 화가 났다', '아이들이 선을 넘는 행동을 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버튼의 위치, 크기, 모양, 강도는 저마다 다 다르다. 아이가 물을 엎지르거나 넘어지는 등 소소한 실수를 저지른다고 치자. 어떤 부모는 실수에 대해서는 화가 나지 않는다고 하고, 어떤 부모는 아이가 실수를 할 때마다 짜증이 올라온다고 한다. 이때, '왜 아이가 실수한 것 가지고 짜증을 내?'라고 양육자들끼리 서로 비방하거나 스스로 자책할 것이 아니라, '나는 왜 아이의 실수에 민감한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 안에 이 버튼들은 왜 생기는 걸까? 
왜 이 버튼들은 우리로 하여금 통제할 수 없는 기분을 느끼게 하고, 
비이성적인 행동과 반응을 하게 만드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 내면에 있는 이 아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른이 된 우리 안에 아이가 울고 있다

겉으로 웃고 있는 어른들 안에 울고 있는 아이

내면아이란 어린 시절 상처 받은 우리의 모습이 그 시각 그 모습 그대로 우리 내면에 자리 잡아 우리 행동과 성격에 영향을 미친다는 개념을 이미지화한 것이다. 성인이 된 우리의 마음속에 상처 받아 울고 있는 내면아이가 살고 있고, 우리의 이 내면아이가 건드려질 때마다 우리는 당시에 해결되지 못한 아픔을 다시 느끼게 된다고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히틀러를 예를 들어 보면, 히틀러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상습적인 폭력을 경험했고 이러한 유년시절을 보낸 히틀러는 훗날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했다. 매우 극적인 예시이지만, 우리 내면의 상처 받은 아이는 이처럼 우리 인생 어느 순간 갑자기 출몰하여 극단적으로 그 아픔을 표현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저자는 상처 받은 내면아이가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폭력과 잔인함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우리 마음속 내면아이는 우리가 들여다보고 그 아이가 가진 상처에 대해 직면하고 이야기를 들어주기 전까지는 철저하게 외면당한 채 울고 있다. 그리고 때로는 과도한 화로, 고집부리는 태도로, 유치한 행동으로, 자신을 의식 또는 무의식 중에 학대하는 태도 등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의 행동과 생각을 지배한다. 


난 정말 완벽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까

이쯤 글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난 비교적 괜찮은 어린 시절을 보냈어. 난 아무 상처도 없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스스로가 어린 시절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고 단언하는 것부터가 괜찮지 않은 상태를 나타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방어기제를 사용하는데, 아마도 내 아픔으로부터 일시적으로 나를 보호하기 위해 합리화 혹은 부인 등의 방어기제가 작동한 것일 수 있다.

당신에게만 인생이 잔인한 건 아닐 거예요

완벽한 부모, 완벽한 어린 시절 환경, 실패나 좌절 한번 없던 유년기. 이런 게 존재할까? 때로는 선생님의 한 마디가, 때로는 나로서 어떻게 할 도리가 없던 환경이, 때로는 부모님의 강압적이고 보수적인 태도가 우리 안에 상처를 남기기도 하지 않는가? 꼭 학대나 폭언, 감금과 같은 극적인 사건이 아니더라도 우리들의 어린 시절에 상처가 되었을 만한 상황과 사건은 충분히 있기 마련이다. 


도라에몽 수집가로 알려진 모 연예인은 한 방송에서 어린 시절 넉넉하지 못한 생활 탓에 장난감을 충분히 소유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수입이 있는 지금 도라에몽을 열심히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아마 그에게 도라에몽은 일반적인 장난감을 넘어서 어린 시절 스스로를 보상해주고 위로해주는 의미 있는 매체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렇듯 누군가에게는 항상 바빠 함께 시간을 보내주지 못했던 부모님이,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의견을 늘 무시했던 친구들 사이에서의 경험이, 누군가에게는 공부를 못해서 선생님께 무시당했던 순간이, 누군가에게는 은근한 방임으로 공허함을 느끼던 어린 시절이 해소되지 못한 채 남아 '상처 받은 내면아이'로 내면에 자리 잡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나요? 왜 그런 말을 하고 있나요? 그 이유를 알고 있나요?


내면아이를 안아주어야 하는 두 가지 이유

이젠 괜찮아, 너는 어른이 됐어, 내가 지켜줄게

그렇다면 우리의 무의식이 방어기제까지 사용하면서 건들지 않으려 하는 내면의 상처를 왜 굳이 돌아봐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우리가 내면아이를 돌보아야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일시적인 안녕이 아닌 진정한 나의 안녕을 위해서이고, 둘째는 나의 상처가 내 자녀들에게 대물림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아픔을 이해해주기만 해도 내면아이의 성장은 시작된다

희한하게도 우리 내면아이는 그 아픔을 이해해주고 보듬어주면 상처를 회복하고 성장하기 시작한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내면아이를 외면하는 이유는, 몰라서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나의 어린 시절이 완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어떤 잘못 또는 부족함을 직면해야 하고, 가난이 불편함이 아니라 힘든 일이었음을 인정해야 하며, 나의 열등한 부분을 들춰내야 하기 때문이다. 완벽한 부모는 있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한데도, 우리는 부모님의 '잘못'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부터 불효자가 되는 기분을 처참하게 느끼곤 한다. 유년기 환경이 힘들고 열악했다고 인정하려고 보니, 남들은 다 완벽한 유년기를 거친 것 같고 나만 지우지 못하는 흠 하나를 가지고 있는 기분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맞아, 아픔을 똑바로 보는 건 큰 용기가 필요해

상처가 깊어 돌이키고 싶지 않은 경우도 있고 참 다양한 이유들이 있겠지만, 확실히 해야 할 것은 내 내면아이를 돌보는 일이 내 부모님의 잘못을, 내 환경을 따지고 원망하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모도 신이 아닌 이상 완벽할 수 없음을 이해하고,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내게 상처가 되었던 부분들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그때 속상했던, 상처 받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알아주고 내가 아팠을 그 시간을 이해해주라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나의 감정과 나의 아픈 상처를 이해받으려 노력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때때로 상대가 나의 감정과 상처를 공감해주지 못하는 모습에 화를 내고는 한다. 하지만 타인에게 먼저 이해받기 전에 우리는 스스로의 아픔을 직면하고 이해해주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내가 그때 얼마나 속상했을지 이해하고 토닥여 주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내면아이는 슬픔을 털고 성장하게 되며,
우리 인생을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닌 미래로 향하게 한다.




내면아이는 자녀를 기를 때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부모님이 소란스러운 것을 싫어하여 항상 집에서 조용히 지내기를 강요받은 자녀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 시간이 상처가 되어 내면아이로 머물게 되었다면, 이 자녀는 훗날 스스로의 자녀에게 동일하게 조용히 지낼 것을 강요하는 부모가 되거나 혹은 '조용함'을 강박적으로 싫어하여 자녀가 매우 소란스럽게 자라도록 양육하는 부모가 될 수도 있다. 선천적으로 자녀가 조용한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을 투사하여 다른 형제에 비하여 유독 조용한 자녀에게 공격적으로 대하게 된다 던 지 혹은 필요 이상의 연민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나부터 나를 사랑해주어야, 내 아이에게 올바른 사랑을 줄 수 있어요


나의 내면아이를 돌보아주지 않으면 대인관계에서, 가족 간의 관계에서, 자녀와의 관계에서 내 내면아이가 언제 어떻게 출몰하여 영향을 미칠지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지금부터라도 내 안에 있는 내면아이를 직면하고 돌보게 되면 나의 돌발적인 생각과 행동들이 어디서 기인하는 것인지 깨달아 갈 수 있고, 깨달음이 있게 되면 나의 행동도 충분히 조절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내 안에는 몇 살 배기, 어떤 모습의 내면아이가 살고 있는가? 그 아이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이해하고 안아주도록 해보자. 나를 올바르게 사랑해줄 수 있는 부모가 자녀에게 올바른 사랑을 줄 수 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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