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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규김 Mar 08. 2023

기독교와 제국주의 식민지배

“대일본제국 덕에 근대화가 됐다”
- 세종시 000교회 목사


한번 보고 눈을 씻고 두번 보고 귀 옆에 손가락을 대고 딱 소리를 내었다. 감각기관은 문제가 없는데 문제가 없는 정보를 뇌가 수용해버렸다. 그러니까 이 상황은 얼척이 없다는 말로 일축 할 수 있겠다. 


지난 3.1절 세종시의 한 아파트에 일장기가 내걸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언론의 조사를 통해 밝혀진 것은 일장기를 건 주민이 다름아닌 한 교회의 목회자였으며, 그가 온라인에 게시된 설교에서 자신의 행동은 문제가 없으며, 일제의 식민지배가 근대화를 이뤄줬다는 망발을 내뱉었다. 


개신교 목회자의 가장 주요한 업무는 설교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목회자의 권위가 가장 강조되고, 목회자의 실력이 가장 쉽게 드러나는 곳이 바로 설교현장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도들은 일방적으로 설교를 듣고 앉아있어야하기 때문에 신학에 대해 특별한 교육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는 성도들에게 있어 목회자의 설교는 신앙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나 목회의 선발 기준이 그만큼 높느냐 하다면 절대 그렇지 않다. 한국에서 가장 큰 규묘에 속하는 교단들 조차도 3년의 m.div과정이 사실상 신학을 공부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으로 두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큰 문제가 하나 있다면 최소로 제시한 것을 그정도만 하면 되겠다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3년을 제외하면 이후로 학교가 아닌 개인적인 차원에서 신학을 연마하는 목회자는 극소수로 줄어든다. 


안타깝지만 이게 현실이다. 목회자가 되는 과정 자체가 매우 쉽고, 일단 목사 안수를 받은 이후라면 큰 문제 없이 계속 목사를 하게된다. 현재 한국 개신교에 분류되는 교단의 숫자는 안그래도 사회적 신뢰도가 땅에 떨어진 교회인데 사람들로 하여금 건전한 교회를 찾는 일이 더욱 어려운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성주신에게 공양 올리듯 예배만 많이 드리면 좋고, 기도 오래하면 좋은줄 아는 풍토에서 신학적 실력이 요구될리는 없다. 부교역자들은 이력서를 넣으며 바라는 한가지가 "상식적인 담임목사를 만나는 것"이다. 때문에 자신의 정치성향을 교리와 동일시하고, 비틀린 인성을 가지고 훈련이라는 명목으로 부조리를 일삼는다. 이미 설교시에 문제가 될 발언이 많이 나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 아닌게 되어버렸다. 교회도 요구하지 않고, 목회자도 관심이 없어 질적 저하는 수십년 전부터 이미 고질적인 질병 처럼 남아 교회의 병폐가 되었다. 


개인적인 하소연은 이쯤 하도록 하고 본론으로 돌아가겠다. 기독교 교리는 여전히 제국주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가? 여기서 '여전히'라는 말을 쓴 이유는 이미 근현대사에서 세계적으로 패악질을 일삼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기독교 문화권의 서구 유럽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교리의 본질도 그런가?




이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 누가복음 23장 34절 중-


기독교의 신학은 이름 그대로 기독 즉, 그리스도 예수를 중심으로 생성되고 완결된다. 구약의 신 이해가 신약에 이르러 삼위일체 신앙에 이르기까지 신학의 변화 역시 이루어졌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 자체가 교리의 핵심이 되었는데, 그의 삶은 로마의 식민지배에 비폭력저항으로 황제의 복음에 맞서는 그의 복음을 전했다. 때문에 그의 자기 희생적 사랑이 계명이 되었고, 초기 기독교는 박해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기 보다 순교를 택하였다. 그들의 신이 십자가 달려 죽었기 때문에 그들이 쫓아야할 궁극적 삶의 표상 역시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대에 유행했던 임박한 종말론과 어우러져 초기 기독교는 박해를 끌어안고 선교를 떠나게된다. 다시 말해 기독교의 근간은 제국주의적 폭력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창세기에는 천지 창조 중 인간을 창조한 여호와가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을 내리며, 이를 '문화명령'이라 부른다. 오늘에서야 신의 창조에 인간이 동참하며, 신이 다스리듯 공의와 정의로 세상을 다스려야한다는 말이 나왔느냐 묻는다면 그렇지가 않다. 애초에 창조 자체가 유에서 무를 만듦이 아닌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 고대의 세계관이었기 때문에 신의 지배질서가 곧 인간이 본 받고 따라야할 지배질서라는 이해가 창세기의 전승에 깔려있었다. 


종교가 지배질서를 정당화하며, 정치권의 이익을 대변해 전쟁과 폭력에 관여했던 것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단순히 인간 이성의 계몽이 세속화와 함께 종교를 사회의 중심에 있게한 고전적인 권위를 해체했다고만 볼 수 없다. 종교가 설득력을 잃었을 때는 그들의 교리와 삶의 괴리, 이상으로 제시한 정치권의 실패, 권력자에 빌붙거나 권력 자체가 되어 악행을 일삼는 개인과 사회 전반의 차원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온라인 상에서 손쉽게 정보를 접해볼 수 있어서 성직자 개인의 잘못이 미치는 공동체에 대한 해악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과거의 사람들이 바보였던 것도 아니다.


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를 비호한 기독교 신학자와 목회자가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치에 끝까지 맞서싸운 신학자들 역시 있었다. 이것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말들이 정말 많지만 본 글에 응용할 수 있는 것을 짧게 정리하겠다. 


신학이 여전히 존재하는 이유는 사람과 사람의 신학은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교리가 죄악을 정당화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세계의 역사에는 폭력에 저항하며 기꺼이 목숨을 던진 기독교인들의 역사 역시 남아있다. 


기독교의 신앙고백은 전인적인 고백이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전인적인 기독교인이 아니다. 예수라는 이를 주라 말하지만 그의 말을 따르진 않는다. 신앙이 자기 영달을 위한 수단이 되어버린다면 이는 보편적인 현상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내세와 기복등의 자기 중심적인 욕망에 매몰된 기독교는 본질적인 가르침을 상실한 어떤 것이 되어버린다. 


예수는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았다. 칼로써 일어난 나라는 칼로써 망했고, 그것이 비록 다윗과 솔로몬의 왕조라 할지라도 당대의 제국들에 의해 산산히 무너졌다. 또한 역사에 다른 나라들이 그랬듯 전쟁으로 강해진 나라는 다시 전화 속에 불타 사라진다. 


때문에 예수가 전하려했던 하나님 나라 곧 바실레이아라고 하는 것이 공의와 정의 혹은 사랑이라 말한 계명과 무관한 것으로 해석하여 접근한다면 기독교는 수백년이 지나도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의 가르침을 계승하며 그의 삶을 재현하지 못하는 교회와 기독교인은 본질을 상실한 종교인이 된다. 안타까운 것은 세상 사람 누구나 그들 역시 기독교라 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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