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대신 '손절'을 선택하는 게 잘못인 이유

한나 아렌트와 주기도문: 용서는 어떻게 닫힌 미래를 여는가

by 광규

"The possible redemption from the predicament of irreversibility—of being unable to undo what one has done though one did not, and could not, have known what he was doing—is the faculty of forgiving."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고 또 알 수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행한 것을 취소할 수 없다는 비가역성의 곤경으로부터 구제될 수 있는 가능성은 용서하는 능력에 있다."


"Forgiving, in other words, is the only reaction which does not merely re-act but acts anew and unexpectedly, unconditioned by the act which provoked it and therefore freeing from its consequences both the one who forgives and the one who is forgiven."


다시 말해서, 용서는 단순히 반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 예기치 않게 행위하는 유일한 반응이다. 용서는 그것을 촉발한 과거의 행위에 의해 조건 지어지지 않으며(결정되지 않으며), 따라서 용서하는 자와 용서받는 자 모두를 그 행위의 결과로부터 해방시킨다(자유롭게 한다).


—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 1958 / 제5장 행위(Action), '33. 비가역성과 용서의 힘'


'손절'이라는 단어가 일상 깊숙이 자리 잡았습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았을 때, 또는 기대했던 마음이 무너질 때, 여러 인간관예에서 갈등이 길어질 때. 요즘 사람들은 서둘러 관계의 끈을 놓아버립니다. 조금이라도 귀찮고 불편한 대상이 보이면 가차 없이 손절이란 처방을 내립니다. 놀라운 것은 현대 사회가 이 씁쓸한 단절을 자기 보호나 내면의 성숙으로 포장한다는 점입니다. '건강한 경계'라는 말이 단절의 방패막이로 쓰입니다.


물론 해로운 관계에서 자신을 지켜내는 일은 분명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경계를 긋는 일과 관계 자체를 베어내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경계는 나를 보호하면서도 관계를 살려두는 선입니다. '이 이상은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 일정한 거리에서 상대를 대하는 것, 특정 방식의 접촉을 거절하는 것. 이것이 경계입니다. 반면 손절은 그 선조차 철거해버립니다. 관계 자체를 종결 처리합니다. 두 행위를 혼동하는 순간, '경계 긋기'라는 건강한 개념이 모든 단절을 정당화하는 만능 변명으로 변질되어 버립니다. 작은 마찰음에도 호들갑 떨며 관계의 전원을 꺼버리는 것은 타인을 사랑하는 능력이 퇴화하는 신호임을 알아야 합니다.


단절을 권장하는 문화의 밑바탕에는 타인을 소비재처럼 취급하는 태도가 깔려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물건은 버리고, 더 나은 상품이 보이면 교체합니다. 관계에도 이 논리를 적용하면, 갈등은 피해야 할 성가신 적으로 전락합니다. 상처 난 관계는 수리할 대상이 아니라 교체해버릴 낡은 물건이 됩니다. 그러나 관계는 소비재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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