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로 성경 이야기 다시 읽기
성경을 읽으면서 냄새가 궁금한 적이 있는지요? 성경 이야기를 들으면서 냄새가 다가온 적이 있는지요? 대부분,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감각적인 깨달음(?)보다 마음에 꽂히는 어떤 단어를 감정적으로 집착하거나 지적인 새로운 깨달음 또는 이미 알고 있던 지식 재확인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화장실 냄새, 향수 냄새, 음식 냄새, 술 냄새, 담배 냄새, 고린내.. 우리 일상은 이렇게 다양한 냄새와 기억으로 가득합니다. 냄새? 어떤 냄새는 아주 강하고 멀리, 그리고 오래갑니다. 어떤 경우는 바람결에 그냥 사라지기도 합니다.
한 여인이 다가와 예수에게 향유를 붓는 이야기는 사복음서 모두에 나옵니다. 그러면서도 작은 차이점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이야기와 발에 부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손님을 환대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고, 거룩한 입맞춤으로 묘사된 어깨와 목을 어긋맞겨 포옹하여 맞이하고, 발을 씻겨주기도 했습니다. 달라 보이는 이야기의 주제는 그런 점에서 어우러져 있습니다. 실제 그렇게 환영받지 않았을지라도, 환대받았다는 것을 표현하는 그림 언어가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 속에 담긴 냄새와 소품(나드 향유, 옥합 등)을 중심으로 낯설게 다가가 봅니다.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 발에 부은 이 이야기, 오늘 본문을 대하기도 전에 우리는 아래와 같은 이야기에 이미 너무 익숙합니다.
”마리아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이 너무도 고마워 “주님께 지은 사랑의 빚, 은혜의 빚을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가장 귀한 것, 제일 소중한 것, 자신의 전 재산에 해당하는 옥합을 가지고 왔습니다. 깨뜨렸습니다. 옥합에 들어 있던 나드 향유를, 몽땅 주님께 부어 드렸습니다. “
옥합을 깨다? 향유가 담긴 그릇은 옥합으로 나옵니다. 옥합은 앨러배스터로 만든, 뚜껑이 있는 그릇을 뜻합니다. 이 옥합은, 밀봉된 뚜껑을 열어야 기름을 붓거나 사용할 수 있습니다. 향유를 담은 용기(그릇)도 물론 수입품이었습니다. 이집트의 특산품이기도 했습니다. 로마 문명권에서는 유리나 토기로 된 그릇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옥합에 담긴 나드 한 근‘은 그야말로 귀하고 귀한 것이라는 표현입니다.
'깨뜨려'라는 표현은 봉인한 뚜껑을 열었다는 뜻입니다. 밀봉한 것을 뜯는 것, 여는 것 이런 것도 ’ 깨뜨리다 ‘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마치 유리를 깨뜨리듯이 옥합을 '부서뜨렸다', '깨뜨렸다'라고 상상을 하지만,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향유를 머리에 붓다? 여유 있는 집에서 손님을 맞이할 때, 머리에 감람유(올리브기름)를 발라주곤 했습니다. 그것은 환대의 의미도 있고, 상대를 귀한 자로 인증하는 성격도 있었습니다. 이른바 ‘기름 부 음’이 넘치는 풍경이었습니다. 이 이야기 속의 한 여인이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 장면은 예수를 초대한 바리새인도 하지 않은 예수님에 대한 '환대', '존귀한 자로 선언함'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향유를 발에 붓다? 향유를 발에 붓는 표현은 더욱 극적입니다. 자신을 최대한 낮추고 가장 높은 존재를 알현할 때의 몸짓이었습니다. 정복한 정복자 앞에 점령당한 자가 최대한 자신을 낮추는 장면도 떠오릅니다.
나드? 이 자리에서 한 여인 마리아가 300 데나리온(정규적 노동자의 일 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값에 해당하는, 남성용 고급 향유 나드 한 병(그릇)의 향유를 발에 부었습니다. 나드 한 옥합, 한 근? 이 향유의 양은, 적게는 350밀리리터부터 많게는 800밀리리터 이상의 양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한두 방울도 아니고, 350-850밀리리터 가운데 적지 않은 양을 쏟아부었습니다. 다 쏟아부었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남은) 향유를 자신의 장례를 위하여 간직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발 위에 부은 그 나드 향유의 냄새는 얼마나 진동했을까요? 얼마 동안이나 계속되었을까요? 밖에서 움직일 때에도 그 주변 멀리까지 바람 따라 그 냄새가 퍼져나갔을 것입니다. 아주 작은 양의 향수를 스프레이 식으로 뿌려도 그 냄새가 반나절, 한나절 이상 유지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 ’ 나드 한 근‘에 담긴 이 여인의 삶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예수 시대, 그 옛날에 돈을 보관하는 방법은 다양했던 것 같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도 버거웠던 서민들에게 여윳돈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그런데 혹여 여유를 낼 수 있었다면, 값나가는 것, 귀한 것으로 저축(?)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이 여인에게는 ’ 나드‘였던 듯합니다. 나에게는 이 여인의 나드와 같은 그 무엇이 있는지요? 무엇이 그것인지요?
여성들의 경제활동이 여의치 않았던 그 옛날, 이 여인은 어떻게 하여 이 많은 양의 나드를 갖고 있었을까요? 어떻게 모은 것이었을까요? 이 여인의 땀과 눈물, 지난 시간의 모든 것이 이 ’ 나드‘에 담겨있었던 것입니다. 왜 모았을까요? 그것은 그 여인의 미래에 대한 꿈의 밑천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지신의 모든 것, 지난날의 아픔과 기쁨, 즐거움과 괴로움은 물론, 미래를 향한 실낱같은 꿈조차도 모두 예수님에게 붓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드 한 근을 예수님을 위해 아끼지 않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크고 작은 성취와 아픔을 보면서, 그 흔적과 열매에 담긴 그의 지난날의 이야기, 삶에 주목하는 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울까요? 성경 속 인물들도 그들의 이야기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의 어떤 행동, 성공의 이야기에 시선이 갇히지 않고, 그 이면에, 그 삶의 이야기에 주목하는 여유는 부려볼 수 없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