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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책장 Jan 09. 2023

내게 불어온 바람

 남편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바람이 났다. 그 바람은 나를 온전히 봐주었다. 나를 주눅 들게 하지 않았다. 내가 나와 만나는 시간을 주었다. 생각하고, 싸우고, 용서하고, 화해했다.

 이제 ‘나는 나를 사랑해’라는 말을 작은 소리로 꺼낼 수 있게 됐다. 그 하나의 낭독 바람이 내 인생에 들어와 조금씩 기적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흔들리는 전철에 몸을 맡기며 휴대폰 화면을 열었다. 건강검진이 있는 날이다. 건강검진센터까지 거쳐야 하는 정류장이 많다. 이 시간에 하기 위해 미루었던 나의 건강 스마트문진표를 작성한다. 문진표의 제일 마지막은 마음을 점검하는 부분이다. 

‘아휴. 이게 또 시간이 오래 걸리지. 그냥 넘겨버릴까?’라는 생각을 하며 체크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싱겁게 마음 문진이 끝나버렸다. 문항이 전에보다 줄어들었나? 생각한 순간, 휴대폰에서 고개를 들어 전철의 투명 유리창을 보았다. 한강 위로 묘하고 깨달음이 가득한 얼굴이 떠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평화로운 물결처럼 내 마음에 고요와 기쁨을 감지한 미소였다.     

 ‘평소 얼마나 우울합니까? 자신이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일에 성과가 오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까?’등의 질문이 있다. 질문과 함께 5가지 보기가 있다.

①자주 그렇다. ② 그렇다 ③ 보통이다. ④ 그렇지 않다 ⑤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매년  보통이다. 그렇지 않다 사이에서 망설이며 신중하게 나를 점검했다. 그동안의 나의 시간이 지금의 상태를 만들었다. 그 마음 사이사이에 아주 많은 것들이 있다. 그 마음을 이 5가지 보기로 나를 말할 수 있을까? 그동안 형식적인 보기라 해도 나는 곰곰 생각하며 선택했다.

 그 고민의 시간이 있어 오래 걸리는 문진표를 내가 거침없이 체크한 것이다. 서슴없이 긍정을 표시하고 있었다. 우울하니?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변한 것이다. 전보다 나를 믿고 사랑하고 단단해진 것이다.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타인에게 좋은 이미지로 남고 싶은 병이 있었다. 그렇게 온 마음을 다해 밖으로 쓰는 에너지는 당연하게도 사람들에게 늘 칭찬과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남겼다, 섭섭함이나 불만도 속으로 삭였다. 그런 나는 어쩌다가 폭발하고 그 관계를 다시 수습하느라고 밤새 온몸이 타들어 갔다. 늘 웃고 있지만 속은 병들고 있었다. 나라는 존재는 점점 작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게 생존이라 생각하고 버티는 게 내 삶이라고 생각했다. 

 밤새 불태우고 꺼져버린 장작처럼 불빛과 온기는 점점 사라진 까만 숯이 되어가고 있었다.  

   

 코로나로 내가 스스로 할 수 없는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해야 했다. 평소 흠뻑 빠져서 읽고 싶다고 생각한 책을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책 속 인물에 공감하고 눈물 흘리고, 내가 몰랐던 타인의 삶을 보고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인지 모르게 간질간질 피어나는 그것이 아이들과 코로나로 갇혀있는 시간을 견딜만한 시간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런데도 뭔지 모를 해결되지 않은 갈증이 있었다. 병아리 눈물만큼이라도 뿌려 해소해야 했다.          

 꺼져가는 나의 숯에 숨을 불어넣어주는 한 가닥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은 나에게 나와 만나는 시간을 선물했다. 그렇게 내 인생의 카테고리에 ‘낭독’을 넣었다. 

 처음엔 휴대폰 음성 녹음의 빨간색 동그라미만 봐도 떨렸다. 녹음한 내 목소리를 들으려면 아무도 없는데도 숨고 싶었다. 아니 1명 있었다. 가장 나를 엄격하게, 온전하게 봐주지 않는 내가 있었다. 그런 마음은 그대로 빠르고 떨리는 목소리로 나왔다. 나는 나를 만나고 누구보다 나 자신을 아낌없이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언젠가 마음이 너무 아파 심리치료 책을 꺼내 읽었다. 과거를 꺼내 고통을 수면 위로 올려놔야 하는 처방에 좌절을 느낀 적도 있다. 그런데 낭독과의 연애는 즐겁다. 뜨겁게 사랑하고 즐겁게 놀다가 싸우기도 하고 잠시 침묵하기도 한다. 삶이 그렇듯 즐거움과 힘듦이 찾아온다. 그 과정에서 내 소리를 내려고 하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내가 예전보다 삶에 대한 시선이 상냥해졌다는 것을 느낀다. 나를 사랑하기 시작한 찰나가 내게 온 것이다.     


 책을 소리 내 읽고, 말하기를 배우고 그 안에서 틈틈이 쏟아낸 눈물로 개운해진다. 또 한 발자국 나가는 사이에 내 마음은 나도 모르게 단단해지고 또 유연해진다. 배꼽부터 웃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런 건강한 내면은 어떤 텍스트를 만나 나를 괴롭혔던 일들이 괴물처럼 나타나도 조금 멀리 떨어져서 볼 힘을 준다.     

한동안. 어쩔 수 없이 나는 낭독과 찐한 사랑을 하겠다. 이런 바람이라면 한눈팔아도 가족들은 환영하는 눈치다. 그래서 바람이 있다면 모든 사계절에 새뜻한 숨을 넣어주는 이 낭독 바람에 우리 가족도, 슈퍼 아주머니도, 옆집 아저씨도, 윗집 큰 개도 그 바람에 올라타서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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