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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우 Sep 25. 2022

익숙한 것들과 잠시 이별하기

6개월 간의 유럽살이 시작

 스스로가 닳고 있다는 기분. 떠나고자 마음먹은 이유는 단지 그것뿐이었다.

하나의 목표만을 가지고 달려왔던 지난 5년 치의 열정과 인내심이 바닥나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근 5년간의 허우적거림 속에서 어느새 가까워진 과거의 꿈들(광고를 만들고, 평생 글쟁이로 살겠다는 식의...). 그 꿈들에 오롯이 닿기 직전에 돌연히 선택한 나의 여행은 많은 이들의 우려를 불러왔다. 그토록 다정한 걱정들은, 물론 내 마음을 약동시켰다. 혹시나 다시 또 뒤처지지 않을까. 혹시나 지난 세월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고.


 그러나 나는 떠나야만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토록 사랑하는 일들을 향한 나의 열정을 영영 잃어버릴 것만 같아서. 참고 또 참으라고 채찍질만 하며 달려온 스스로에게, 그 채찍질로 생긴 상처들을 회복할 얼마간의 시간을 건네야만 할 것 같아서.

그래서 나는, 익숙한 서울을 뒤로한 채 유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바르셀로나로 향하는 16시간 30분의 비행 동안 나는 내내 잠을 잤다. 하루 서너 시간이면 충분했던 나의 수면시간이 유독 비행기에서만큼은 지켜지지 않았다. 불친절하고 신경질적인 나의 수면 패턴이 아주 오랜만에 길들여진 장소가, 편히 잠들기엔 다분히 불편한 비행기의 이코노미석이라니. 따분함을 달래기 위해 챙겨간 몇 권의 책과 몇 편의 영화는 구름 위에서 무용지물이 되었다.

윙윙거리는 비행기 엔진 소음을 자장가 삼아 그리웠던 단잠에 빠졌다.     


 졸린 눈을 비비며 도착한 경유지 암스테르담에서의 짧은 휴식. 찌뿌둥한 몸을 꿈틀대며 다시 오른 비행기의 창밖으론 짙은 분홍으로 물든 유럽의 하늘이 비추었다. 진분홍으로 물든 내 눈동자는 유럽에 대한 나의 환상을 부추기기 시작했다. ‘핑크빛’으로 바라보며 살기. 여행도, 일상도, 기쁨도, 슬픔도, 괴로움과 노여움도, 간간히 마주할 착하거나 못된 사람들까지도 모두 다 핑크빛으로 바라보자고 다짐한 순간이었다. 내 앞에 놓일 반년 간의 유럽 생활을 나는 그렇게 지내기로 했다. 때로는 나 자신을 나아가게 했지만, 종종 스스로를 옭아매기도 했던 투철한 계획성과 목적성. 유럽에서의 6개월은 그런 것들로부터 오롯이 해방된 시간으로 살기로 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이것도 저것도 핑크빛, 이 사람도 저 사람도 핑크빛. 이래도 행복하고 저래도 행복하게. 이곳은 모두가 분주한 서울이 아니므로. 이곳은 유럽이므로.


 가끔씩 익숙한 서울과. 익숙한 사람들과. 익숙했던 나의 삶과 잠시 이별한 채 과연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익숙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무지의 장소. 여기에서도 저기에서도 오롯이 무명인 나로, 누군가의 누구도 아닌 단지 나일뿐인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이곳 유럽. 나는 이 환경이 주는 해방감을 등에 업고 최대한의 행복을 얻어야만 한다고 생각을 고쳐 먹는다. 그래야만 반년 뒤 다시 이어질 익숙한 서울에서의 삶을 온몸으로 살아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내 첫 책의 한 꼭지에서 나는 썼다. ‘일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이 벅찬 일상을 더 잘 살아보고 싶다는 역설적인 마음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고. 그때나 지금이나 나의 생각은 변함이 없다. 서울에서의 삶을 더 잘 살아보기 위해 나는 이곳 유럽으로 도망쳐온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도망은 충분히 행복할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 다독임 속에 나는 어느새 바르셀로나 엘프라트 공항에 내렸다. 충분히 행복할 나의 6개월은 그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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