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의 근검절약, 10%의 낭만추구
나는 오랜 신경증으로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일정한 직장 생활과 수입원이 자꾸 끊어지는 바람에 20대 중반부터는 자연적으로 절약 생활이 몸에 배기 시작한 사람이다. 프리터로 자취할 때는 한겨울에 난방 텐트만으로 보일러도 거의 틀지 않은 채 몸이 굳어 지낸 적도 있고 연애, 옷 또한 관심을 끊었던 시기가 길었다. 그러다 보니 현재 30대 중반에 다다르게 되었고, 어느덧 건강은 회복되었지만 잃어버린 시간까진 돌이킬 수 없어 아쉬움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근검절약하는 생활은 부모님으로부터 배운 것도 많다. 부모님은 직장 생활을 오래 하셨지만 절약을 위해 아버지는 총각 시절 옷을 꿰매 입어 결혼 당시 멀쩡한 옷이 없었다고 하셨고 어머니는 몇 년간 한 벌의 바지로만 사계절을 출근하신 적도 있다고 종종 들어왔다. 어린 시절엔 가족 여행이나 외식도 해본 기억이 거의 없을 만큼 맞벌이로 바쁜 세월을 무척 열심히 사셨다.
그래서 우리집은 잘 풀렸고 부모님 노후준비도 다 되어 지금은 큰 걱정 거리가 없을 정도다(나만 열심히 살면 된다). 이게 정말 감사한 일인 건 알지만 한편으론 사실 자식 입장에선 답답한 부분도 있다. 부모님의 사상과 생활방식을 필터링 없이 내가 온전히 이어받고, 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받아들이며 살고 있었다는 걸 어느 순간 안 것이다.
아버지는 가끔 내가 맛있는 배달음식으로 상을 차리면 “우리가 지금 이럴 때야? 위기의식을 가져야지.” 하고 농담 반 진담 반같이 말씀하신다. 그때마다 어느 순간부턴 숨이 막히고 세상 뜰 때 돈을 보자기에 싸가지고 갈 것도 아닌데 순간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무조건 근검절약과 인내로 살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독하고 무섭게 느껴졌다. 어머니 또한 내가 뭔가 소확행스러운 물건이나 커피 한 잔을 사 오면 “이런 거 필요 없어. 쓸데없는 데다 돈 쓰지 마라.” 하실 때가 있는 걸 보면 두 분은 데칼코마니인가 싶을 정도다.
정말 보통 사람들이 아니다. 물론 평소의 그 지독한 근검절약 정신 덕분에 내가 아파서 경제활동을 제대로 못할 때도 먹여주고 재워줄 본가가 있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자식 교육에도 아끼진 않으셨고. 그렇지만 이제는 내가 독립을 할 때가 된 건지, 기준과 사고방식이 달라진 탓인지 거부감이 들기 시작한 것뿐이다.
그래서 요즘은 근검절약하며 직장 생활로 벌어둔 돈을 아이러니하게도 퇴사한 뒤로 더 열심히 쓰고 있다. 며칠 전에는 3박 4일간 서울 여행을 다녀왔다. 어차피 병원 상담과 약 처방을 받으러 한번은 가야 했고 시간도 많으니 여름휴가 겸해서 떠난 것인데, 여행 테마를 ‘예쁜 소품샵 투어’로 잡았다. 한 마디로 서울 올라가서 귀여운 물건 구경과 쇼핑을 하고 오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새로운 움직임은 나에게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는데, 몇 년간 불안함에 심적 여유가 없이 생존만 염두에 두며 돈 드는 취미를 거의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올라가자 마자 서울 홍대 주변과 망원, 더 현대 서울 등을 돌아다니면서 귀엽고 예쁜 소품을 감상하기 바빴다. 요즘 서울 소품샵은 인형 옷 입히기가 트렌드란 걸 알았다. 그 옷이 꽤 비싸다는 것도. 내가 사는 도시에서는 절대 생기지 않을 팝업스토어부터, 새롭고 신기한 것들에 마음을 모두 빼앗기고 그간 스트레스마저 다 잊어버릴 정도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 나서 생각했다. 몇 년씩이나 이런 소소한 행복을 잊고 살았다는 것은 나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는 증거 아닐까 하고. 이런 취미가 월 수십만원 들 정도는 아닌데 그간 왜 그렇게 팍팍하게 살았던 건지 모르겠다. 인생의 작은 낭만조차 포기할 만큼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거나 가난한 적은 없었는데 말이다.
부모님과 같은 근면성실, 근검절약도 좋지만 살아온 시대도 다르고 사람도 다르니 거기에 100%를 태울 필요는 없었다. 알고 보니 의무가 아니고 옵션이었다는 사실. 적당히 여유를 갖고 숨 쉴 만큼만, 생활에서 한 10%의 낭만을 위한 취미 예산은 만들어 두기로 결정했다. 그 작은 10%의 낭만 때문에 요즘 다시 인생을 재밌게 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앞으로 내가 맞이하게 될 고된 세상살이도 이런 작고 예쁜 위로들로 조금은 버틸만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