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준비기간 동안 해야 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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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많은 일들이 그러하듯 시간은 많은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시간은 상처를 낫게 해주기도 하고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게도 하며 생각이나 태도도 바꿉니다. 오늘의 문제는 내일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제가 16년 차 다닌 회사에서 깊은 번아웃이 찾아온 이유는 찾아보면 최소 5개 이상은 댈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문제들이 해결 못할 문제들도 아니었습니다. 이전처럼 시간이라는 만병통치약과 마음가짐을 통해 넘어가질 수도 있었겠죠.
회사를 오래 다니면 좋은 점 중의 하나는 회사생활에서의 어떤 패턴들을 숙지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크게 놀랄 일도 해결 불가능한 일도 거의 없습니다. 제가 몸 담은 회사는 앞서 말했듯이 월급이 밀린다거나 임원들이 도덕적, 윤리적 해이가 있다거나 못살게 구는 미친 X가 있다거나 하는 퇴사 3대 요소가 없습니다. 저는 만년 팀장이기는 해도 조직이 우수조직상을 받기도 했고 팀원들과도 사이가 좋은 편이고 (저 혼자만의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재택근무나 자녀 돌봄 휴가 등 일하는 환경도 점점 개선되어 업무 환경도 크게 불만이 없습니다. 연봉이 그리 높지는 않지만 다른 조건들을 생각하면 참지 못할 수준도 아닙니다. 누구는 복지병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지금의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나은 선택일 지도 모릅니다.
말로 정리할 수 있는 뚜렷한 이유였다면 좋았겠지만. 저의 경우는 무엇을 하고 싶은 의지나 아이디어, 체력이 고갈되어 일뿐만 아니라 숨쉬기조차 힘들어졌습니다. 참고 견디고 1년, 길게는 3년까지는 어떻게든 버티는 것도 가능했겠지만 그 뒤의 제 모습을 상상해 보면 좋은 그림이 안 그려졌습니다. 회사를 참고 다니면 다닐수록 고갈될 수밖에 없고 무엇을 할 여력이 없어진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연금을 탈 수 있는 나이에 가까워지기를 바라면서 하루하루를 견디는 그런 삶을 살 수는 없었습니다. 견디는 것은 이미 많이 했고 심지어 몇 안 되는 잘하는 일이 되어버린걸요.
무엇보다 저는 이 회사에서는 정말 할 만큼 했다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후회되는 일이 없고 할 만큼 했기 때문에 미련도 없었습니다. 30대에 경주마처럼 뛰다가 마음도 다쳐보고 실망도 해보고 내쳐지기도 하고, 회사인간으로서 미생으로 살았습니다. 무언가 해보고 싶다는 불씨가 완전히 사라지고 회사라는 트랙에서 내려올 타이밍이라고 느꼈습니다.
시기는 다르지만 회사원은 모두가 언젠가는 퇴사합니다. 회사원이라면 누구나 해당됩니다. 저는 그 시기에 대한 확신이 20년을 달리고 이제 든 거죠. 저는 퇴사 결심한 후 6개월을 퇴사준비의 시간으로 잡았습니다. ‘퇴사하겠습니다’의 저자 이나가키 에미코는 아사히 신문에 다니던 40세에 퇴사를 결심하고 10년을 준비후 50세에 퇴사를 했는데요. 이렇게 까지 길게는 아니더라도 퇴사 준비의 시간은 필요합니다. 저는 깊은 번아웃을 겪고 있는 상태여서 퇴사 준비 기간을 길게 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아사히 신문의 이나가키 에미코와 비교하면 많이 다릅니다. 그녀는 '남편 없음, 자녀 없음, 냉장고 없음, 도시가스 없음..'(미니멀리스트) 이라지만 저는 '남편 있음, 자녀 있음, 냉장고 있음, 도시가스 있음, 아파트 없음.. '(무엇 하나 잘 버리지 못하는 맥시멀리스트)입니다. 어떤 경우가 더 나은 환경이라고는 확언하기 어렵습니다. 자녀가 있으면 아무래도 부모로서 책임감이 뒤따르기 때문에 매월 들어오는 근로소득이 당장에 끊긴다면 생활이 걱정됩니다.
여기서 말합니다.
"회사는 우리를 이룰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우리를 파괴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회사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이유이다."
(4회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