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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사람 May 16. 2023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바다색은 다 같은 파랑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준 함덕해변의 에메랄드 빛 바다. 비 오는 날 투둑투둑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었던 카페와 한적한 마을 속에 당근주스가 기가 막히던 카페. 제주 안에서도 특히나 이런 아기자기한 즐거움이 많은 동쪽 주변을 더 애정해왔다. 제주 여행을 할 때면 늘 구좌읍이나 세화리 위주로 다니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제주 아랫동네의 추억은 미미해져 갔다. 맛집도 한번 꽂히면 여러 번을 간다. 그렇게 가던 데만 가다 보니 어느 순간 서귀포와는 조금 어색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내 취향이 아닐 거라는 막연한 편견도 생기기 시작했다. 이제 그 서먹한 친구랑 조금 가까워져보려 한다.

넓은 도로를 전세 낸 듯 달린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의 주인공이 된 것 같다. 진짜 영화처럼 창문을 죄다 열고 머리칼을 휘날리고 싶었으나 제주 바람에 못 이겨 눈으로만 즐겼다.

달리다가 창 밖 분위기가 확 달라짐을 느꼈다. 내비게이션을 보니 서귀포시였다. 신기했다. 표지판이 따로 없어도 다른 동네가 되었다는 걸 딱 알 수 있을 정도로 느낌이 아예 다르다. 갑자기 달라진 풍경이 어린이 만화 영상 같은 것을 데려온다. 동쪽은 푸른빛을 띠고 오밀조밀하게 생긴 요정들이 평화롭게 모여 살고 남쪽에서는 파랑에 노랑 물감을 그러데이션으로 섞은 공룡이 섬을 수호한다. 제주에 오니 비현실적인 상상을 자주 하게 된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곳이라 그런 것 같다.  

보롬왓에 도착했다. 의도한 건 아닌데 제주에 오고 꽃구경을 오지게 한다. 굳이 꽃 축제를 가지 않아도 제주의 봄이 곳곳에 만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지어 유명한 꽃밭을 일부러 찾아왔다? 정말 눈을 돌릴 때마다 꽃이 다복다복 피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끝없이 펼쳐진 유채꽃밭은 노란색 바다 같았다. 뇌보다 입이 먼저 반응한다. 아름답다 어떻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미쳤다”라는 감상평을 자꾸 쏟아낸다. 미쳤다 코드만 입력된 로봇이 된 것마냥 계속 그 말만 반복한다. 진심으로 미친 풍경이었다. 해변을 걷다 보니 하얀색 무밭도 있다. 눈길이 줄기를 따라 밑으로 간다. 땅에 박힌 무의 머리 부분이 보인다. 머리만 빼꼼 나온 모습이 귀엽다. 무를 보고 깍두기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나는 확실한 한국인이다.

한쪽에선 음악 소리가 들린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어갔다. 한 밴드가 연주를 하고 노래를 부른다. 카메라와 관계자들이 있는 걸 봐선 무슨 촬영을 하는 것 같았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들이었다. 연예인 같지는 않았지만 어느 유명 가수보다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노란 바다 안에서 몸을 세게 흔들고 뛰며 음악에 빠진 모습은 경이로웠다. 어디 없을 멋진 장소에서 내가 가장 탐내는 재능을 맘껏 뽐내고 있는 그들이 부러웠다. 넋을 놓고 보게 만들었다. 한 곡의 마지막 음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가만히 서서 감상했다. 봄꽃과 바이올린의 따뜻한 하모니 덕분인지 차가웠던 바람이 어느새 보드랍고 화창하게 느껴진다.

서귀포 뽕에 촉촉하게 젖은 채 다음 장소로 간다. 수망다원이라는 카페였다. 주차장에 차가 없다. 문 앞에 갈 때까지 손님들 왕래가 느껴지지 않아 잘못 온 건가 싶었다. 불안한 기운으로 망설이자 친구가 들어가서 별로면 나오자고 했다. 맞아, 맘에 들지 않으면 나오면 된다. 용기를 내서 발을 뗐다. 그러고 우린 보롬왓에서보다 더 많은 감탄사를 쏟아냈다. 들어가자마자 유리 통창으로 초록빛이 쏟아진다. 카페 밖으로 녹차밭이 펼쳐져 있었다. 온통 초록색이었다. 시력이 좋아질 것만 같다. 마침 조금 어두웠던 하늘에 해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구름의 뭉게뭉게 한 윤곽이 확실해진다. 노랑 초록 파랑을 이리도 가득 담는 여행이라니. 기분까지 알록달록해진다.

녹차밭이 있는 카페를 왔으니 녹차라떼를 주문한다. 와 그런데 여기, 라떼랑 디저트까지 맛있다. 미안하지만 평소에 좋아했던 스타벅스의 ‘제주말차로 만든 라떼’는 비빌 게 아니었다. 너무 맛있어서 아껴 마시고 싶은 정도였다. 뭐 하나 흠잡을 데가 없다. 그야말로 완벽한 카페이다. 어떤 항목의 최고로 사랑하는 자리는 웬만하면 쉽게 내주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또 최애가 바뀐다. 여기를 내 최애 카페로 정한다. 제주에 오고 계속해서 최애 카페가 경신된다. 너무 팔랑팔랑하게 최애가 바뀌는 거 아닌가 생각했다. 왕좌에 올라가기 무섭게 금방 순위가 내려간 직전 최애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사랑은 움직이는 거다.


카페가 아니더라도 나의 최애는 자주 바뀌었던 것 같다. 그때그때 가장 잘 맞는 친구가 다르고 가장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음식도 달라진다. 하지만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는 유행어가 사용된 상황과 같은 의미는 아니다. 최애에서 밀려난 것들도 여전히 사랑한다. 목소리 큰 사람이 게임에서 유리한 것처럼 현재의 목소리가 제일 잘 들리기 때문에 지금 당장 너무 좋은 것이 최애가 될 뿐이다.


처음에는 내가 아직 쉽게 놓지 못할 최애를 못 만나서 그런 게 아닐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카페 다니는 걸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대한민국 구석구석 좋다는 카페를 많이 가봤지만 최애가 몇 번 바뀌었기 때문이다. 나중엔 그저 무언가를 쉽게 잘 사랑하는 나의 성질로 인해 그렇게나 자주 최애가 바뀌었다는 것을 깨단했다.


그 후 간 정방폭포와 외돌개도 정신을 못 차리게 아름다웠다. 서귀포올레시장으로 하루를 갈무리한다. 올레시장은 시장 중의 최애가 되었다. 내 취향의 먹거리가 어쩜 그리도 많은지. 저녁 먹을 식당을 정해놨기 때문에 먹고 싶은 걸 참느라 혼났다. 마지막까지 근사하게 하루가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제주 최애 도시도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정말 사랑스러운 봄날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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