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초 가족을 어렵게 설득하고 설득해서 오랜만에 세 식구가 할머니 집인 서울로 자가용을 타고 출발했다. 일단 가겠다고 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도 좌절을 거듭하다 보면 고마움으로 변한다는 것을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런 식으로 배워나가고 있다.
그냥 곱게 넘길 것도 그렇게 안된 지 오래되었기에 차분히 마음을 추스르고 아무런 탈없이 이번 여정이 끝나기를 바라면서 출발부터 노력했다.
'그냥 그런가 보다. 그냥 조금 생각하는 게 다른 거다. 아무런 악감정 없이 문화가 달라서 그러는 거다.'
이렇게 참고 참으며 가끔 뒤에서 들리는 불쾌한 소리도 그냥 바람처럼 흘려보내며 최대한 웃으면서 4시간 동안 운전했다. 이런 무겁고 이상한 분위기 속에서도 가장 신이 난 것은 딸아이였다. 서울 가는 목적은 모두 달랐다. 딸은 삼촌에게 어린이날 큰 선물을 받는다고 쇼핑 리스트를 만들었고, 가족은 가고 싶었던 애버랜드를 가는 것, 그리고 나는 온 가족이 다 같이 올라가서 어버이날 축하도 해드리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모두 무엇인가 함께 한다는 공통적인 목표는 존재했다.
아내의 바람대로 우리는 거의 첫 손님으로 애버랜드에 입장했다. 평범한 가족처럼 자유이용권을 들고 이곳저곳을 다녔다. 그리고 엄청난 에너지 소모에 이내 피로감과 기다림에 지쳐가고 있었다. 날씨도 어찌나 덥던지 휴대용 선풍기를 들고 오지 않는 것과 모자를 챙기지 않은 것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아내의 습관 때문에 기분이 몇 번이나 안 좋아졌다. 그래도 날이 날인 만큼 그냥 표현하고 그 자리에 풀려고 애써 노력했다. 가족은 언제나 다 같이 밖에 나오거나, 이런 곳에 오면 딸아이 손은 후 한참 나를 앞질러 사라졌다. 아니 시야에는 있었지만 우리는 일행이 아닌 것 같았다. 그냥 다른 곳에 온 것처럼 행동했다.
이런 버릇이 약간 있어서 연애 때부터 몇 번 말했지만, 그때뿐이고 무시했다. 원래 자기가 하는 모든 것은 완벽하고 남의 시선이나 의견은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라. 나는 포기를 했다.
그래서 그냥 멀리서 뒷모습을 보면 따라다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분 나쁘다고 이야기했다. 큰 싸움이 될 가능성이 있지만 내가 감정이 상하면 나도 행동이 달라지는 것을 알기에 예방차원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선택했다.
"같이 가자고."
아내는 자기는 나를 두고 온 적 없다고 내가 늦게 걷는 거라고 나를 원망했다. 나는 그냥 거기서 알겠다고 대답하고, 그래도 가족 여행 왔으니 다 같이 걸어 다니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딸아이도 동의했고 비슷한 거리를 유지하며 놀이기구를 타며 시간을 보냈다.
평소 같으면 그냥 무시했을텐데 기분 상한 상태로 엄마를 보러 가고 싶지 않았다.
나도 나를 잘 안다. 상당히 민감한 편이라서 한 번 기분이 상하면 쉽게 회복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라도 짧은 전투를 치르는 것이 훨씬 나았다. 피할 수 없는 것을 알기에 이왕 전투를 한다면 큰 전투보다 소규모 전투를 택하는 쪽으로 전략을 선택한 것이다.
내 전략 덕분인지 우리는 7시간 동안 나름 큰 탈없이 딸아이를 위한(사실 가족이 가고 싶었던) 어린이날 에버랜드 일정을 마쳤다. 너무 피곤했지만 연휴가 붙어 있어서 저녁에 도착해서도 이틀 밤을 서울에서 보낼 수 있으니 괜찮다고 스스로 피곤함을 달래며 바로 2시간 더 운전해서 동생집에 도착했다.
도착하니 9시가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동생은 잠자리에 민감한 가족을 위해 작은 밤에 이미 이불이며, 베개 그리고 청소까지 모두 마쳐둔 상태였다. 아침 먹을거리도 가족과 딸 취향에 맞춰서 장까지 봐두었다. 형수라는 사람은 동생이 엄마 모시고 내려오겠다고 하면 위험하다고 싫다고 매번 단칼에 자르는데 속도 없이 착한 놈은 항상 이렇게 배려를 해준다. 글해서 언제나 난 미안하다.
오기 전에 몇 번이고 통화를 했고, 우리가 오는 시간쯤 맞춰서 음식까지 주문했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가족은 태도를 달리했다.
사실 가족은 9시가 넘었으니 집에 가면 바로 자야 한다고 오는 길에 아무거나 먹자고 했다. 하지만 마땅한 식당도 없었고, 다 같이 저녁을 먹는 것이 더 의미가 있어서 가서 먹자고 했다. 그리고 딸아이도 그걸 원했다.
결국 내 뜻대로 했던 것이 화를 불렀다. 족발과 보쌈이 배달 왔는데 아내는 음식 온 것을 무시하고 딸아이를 데리고 바로 샤워하러 들어갔다. 계속 늦었다는 말하며 딸을 재촉했고, 할머니집에 와서 삼촌에게 선물을 받겠다고 흥분한 딸아이의 기분을 다운시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밀려왔던 그리고 참아왔던 화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나는 결국 한마디 하고 말았다.
"뭐 하는 거야? 음식 왔으니까 좀 먹어야지!"
하지만 반응은 역시. 피곤하다고 바로 정색하며 작은 방으로 들어가서 아내는 울기 시작했다.
결국 노력했지만 내가 가장 싫어하는 시나리오가 또 벌어졌다. 한 사람을 세상에 하나뿐인 쓰레기로 만드는 최강 무기인 눈물을 써버렸다. 아이는 엄마 우는 모습에 불편해하며 엄마 옆에 붙어서 엄마가 하고 싶은데로 하겠다고 애원했다. 씻으러 밥 안 먹어도 된다고 엄마한테 옆에서 울지 말라고 눈치를 봤다.
아무리 엄마가 치매라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도, 아무리 남동생이 이해심이 좋고 그냥 다 넘겨준다고 해도 참 이건 아니다 싶었다.
결국 그들은 샤워하러 들어갔다. 배달 음식은 앞에 앉은 것은 아픈 엄마와 나 그리고 동생이었다. 엄마는 눈앞에 있는 고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지금 벌어진 상황은 전혀 입력되지 않았다. 아들의 고통도 이런 꼴로 살아가는 이 모습도 이제 엄마에게는 아무런 걱정거리도 되지 않았다.
입맛은 다 사라져 버리고 그냥 멍하니 고기를 주섬주섬 입에 넣고 소주를 마셨다. 그리고 생각했다.
차리리 엄마가 아픈 게 어쩌면 다행이라고.
'만약 이 꼴을 멀쩡한 상태로 엄마가 봤다면 아마도 속이 다 타들어 갔을 테니까. 또 겉으로 표현도 못하고 착한 우리 엄마는 그냥 그저 속으로 나를 응원하며, 하나뿐인 딸을 생각해서 이 가정을 잘 지켜나가라고, 조용히 김치찌개를 해줬을 것이다. 예전에 아빠가 사고 치고 내가 수습하면 말없이 내게 해줬던 것처럼...'
동생은 역시 아무 말도 없었다. 내편도 형수편도 아닌 그냥 평화를 위해 감정을 삭제한 AI처럼 그냥 고기를 먹고 내 빈 잔을 채워줬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최대한 낮은 톤으로 작은 방에 들어가서 모두 배고프니 나와서 뭐라도 조금 먹으라고 권했다. 이런 꼴로 사는 것도 이제 지겹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이 평화를 위한 최선이었다. 보통 때라면 고집을 피우며 절대 안 먹을 테지만 애버랜드의 강행군 때문에 배가 너무 고팠는지 잠시 후 거실로 나와서 식탁에 앉았다. 이미 분위기는 최악이 된 후라 더 이상 어쩔 도리는 없었다. 그냥 우리는 눈앞에 있는 음식에 집중했고, 엄마는 반찬 몇 개를 앞에 두고 자기 방으로 가져가겠다고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동생은 조카에게 무슨 선물을 받고 싶냐고 말하며 내일과 모래 일정을 논했다. 분위기는 살짝 반전되었고, 딸아이는 산리오 카페도 이야기하고 이미 봐둔 선물이 있다고 삼촌에게 애교를 부렸다. 그 모습에 훈훈해질 무렵 갑자기 핵포탄이 날아왔다. 가족이 대화를 중간에 자르고 말했다.
"내일 집에 가야지! "
순간 온 가족은 모두 가족을 얼굴을 쳐다봤다. 저녁 9시에 도착했고 연휴가 있어서 하루 더 머물 수 있는데 다음 날 점심때 집에 내려간다는 그 말을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주 오가는 사이라면 어쩌면 이해라도 해볼 터지만 1년에 아니 2년에 겨우 한 번 올라오는데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더 어이가 없었다. 이유는 바로집에 혼자 남아 있는반려견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순간 기가 막혀서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딸도 그렇고 모두 이틀밤 자고 갈 거라고 생각했기에 당황했다. 기억하기로는 나는 분명 그렇게 하기로 서로 대화했던 거 같은데 가족은 아니었던 것이다.
가족은 반려견이 심장도 좋지 않기 때문에 안된다고 세상 차갑게 다시 이야기했다. 딸도 엄마를 설득하려고 잠시 시도했지만 이내 포기해 버렸다. 여기서 한 마디를 더 하면 또 아이 앞에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일까 봐 나는 먹던 숟가락을 그냥 두고 차에 뭐를 두고 왔다고 말하며 바로 자리를 피해 밖으로 나왔다.
1층으로 내려와서 아파트 주변을 서성이면서 안정을 찾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다.
'어쩜 저럴까?'
'어디부터 이해해야 할까?'
'마지막 어버이날이 될지도 모르니 가고 싶다고 말한 내 진심은 그냥 헛소리였던 걸까?'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처럼 뜨거웠다. 저 밑에서부터 분노가 계속 올라왔다.
'반려견보다 못한 게 사람인가? 그것도 내 어머니란 말인가?'
나 또한 동물을 참 좋아한다. 10살 때부터 30년 동안 항상 우리 집에는 반려견이 있었다. 너무도 익숙하고 너무나 사랑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적어도 적어도 뭔가 구분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이럴 생각이었다면 데리고 오자고 상의하거나, 애견호텔이라도 내게 부탁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런 타협은 나와 논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뻔했다.
그냥 하룻밤 그것도 에버랜드 가는 김에 들려서 빨리 자고 다음날 내려오는 시나리오. 그게 다였던 것이다. 겨우겨우 참고 올라갔더니 먹을 것만 쏙 먹고 피곤하다고 동생이 깔끔히 만들어 둔 작은 방으로 이미 딸을 데리고 들어가 있었다. 저번처럼 딸아이는 놀고 싶어서 작은 방에서 엄마에게 반항을 했지만 이미 엄마의 눈물을 본 딸은 놀고 싶은 마음을 눌러버리고 그 방에 남는 것을 선택하고 있었다.
동생은 내 표정을 보고 눈으로 조용히 내게 말을 건넸다.
'그냥 내버려 두라고, 변하지 않는다고, 그냥 저런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스트레스받지 말라고. 그냥 조금 있다가 가더라도 그냥 엄마랑 다 같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자고...'
딸아이에게 어버이날 할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을 아니 윗사람에게 이런 효도를 하는 문화를 알려주고 싶었다. 내가 세상에 중심으로 사는 것도 정말 좋지만 그래도 챙겨야 하고 지켜야 하는 도리를 아는 그런 아이로 자랐으면 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이런 사소한 것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싫었다.
엄마가 아픈 것도, 아빠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것도, 뭐 이것저것 가져다 붙이면 너무 억울했다. 물론 지금 이 공간에서 엄마보다 억울한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그랬다.
결국 엄마는 거실과 냉장고를 계속 돌아다녔고, 작은 방은 아무도 없는 빈방처럼 닫쳐있고, 나와 동생은 거실 식탁에 조용히 앉아서 맥주를 마시며 생각했다.
이해라는 단어가 이처럼 행동으로 실천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몰랐다. 그냥 넘길 수도 있었지만 못난 아들 때문에 엄마가 더 아픈 것처럼 초라하게 느껴졌다. 내가 생각하는 진심과 가족이 생각하는 진심이 다를 수도 있다. 아니 절대 같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온몸으로 고생하며 엄마를 모시고 사는 동생집에 오는 것도 이렇게 어렵다면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어쩌면 반려견을 걱정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옆에 오라면 오기도 하고, 반기기도 하고, 같이 산책도 갈 수 있으니 말이다.
반면에 하나뿐인 우리 엄마는 오직 과자와 사탕 그리고 냉장고 이 세 가지 때문에 살고 있다. 우리에게 짐이자 아픔 그 자체이다. 그 어떤 것도 엄마한테 이제는 중요하지 않다. 가끔 올라와서 엄마의 행동을 보고 있으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든다. 밤새도록 냉장고와 부엌을 백번 넘게 오가며 열고 닫으면서 아무 생각 없이, 말도 없이 똑같은 행동만 반복하며 과자를 먹고 또 먹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여기가 지옥이인가 싶다.
단지 이게 자식인 나에게는 지옥이고, 타인에게는 그저 치매 환자일 뿐이니 가족에 내 감정을 이해해 달라고, 서운 다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하만 안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조용히 거실에 누워서 유령처럼 왔다 갔다 하며 냉장고 앞을 서성이는 엄마의 인기척에 느꼈다. 그리고 갑자기 서글픔이 몰려왔다. 차라리 이 모든 게 지독한 악몽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게 현실이 아니라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이 지독한 하루를 끝내면 꿈에서라도 건강한 엄마와 행복한 하루를 보내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