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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환 Jul 02. 2024

68. 펜션에서 엄마가 사라져 실종신고를 했다.

6월 초, 동생과 이야기했다. 엄마가 두 다리로 걸어 다닐 수 있는 지금 어디로든 여행 한 번 가자는 것이었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서 잠시 여행을 망설이기도 했다. 종종 엄마를 모시고 나름 좋은 곳을 당일치기로 가곤 했다. 하지만 엄마에게 어떤 장소도 큰 의미가 없었다. 여행이라는 것이 목적지에 도착하는 과정이 더 신나고 설레는 법인데 말없이 조용히 앉아서 과자를 달라고 손가락으로 나와 동생을 툭툭 치며 사탕을 갈구하는 엄마의 무한 반복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때로는 힘들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지금 아니면 또 언제 이렇게 가족여행을 가나 싶었다. 엄마의 증상이 호전될 일은 불가능하고, 살면서 앞으로 형편이 나아지거나 좋은 일이 생긴다는 보장도 없기에 그나마 여건이 되는 현재 움직이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가평에 펜션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시간을 맞춰보니 6월 중순이 좋아서 그 일정으로 찾았지만 거의 모든 펜션은 자리가 없었다. 다행히 복층 구조로 된 곳 방하나 남아서 부랴부랴 예약을 했다. 1박 2일 짧은 일정이라서 크게 준비할 것은 없었다. 


가족에는 딸아이가 간다고 하면 딸을 데리고 다녀오겠다고 했다. 서운한 기색은 크게 없어 보였다. 함께 보내는 시간을 불편해하는 가족과 어딘가를 억지로 가지 않겠다고 다짐한 터라 나도 불편할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딸아이랑 더 많은 추억을 만들고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휴게소 인형 뽑기를 모두 시켜주겠다는 말로 유혹하며 아이를 설득했다. 다행히 엄마와 떨어져도 아빠와 함께 가겠다고 딸아이가 오케이를 했다. 

막상 여행 출발일이 되니 가족은 조금 서운한 듯 잔소리를 하며 딸아이 짐을 싸줬다. 그렇게 여행 전날 우리는 서울 집으로 향했다. 약속대로 올라가는 길에 모든 휴게소에 들려서 인형 뽑기를 했다. 운이 좋게 두 번째 휴게소에서 딸아이는 인형 한 개를 뽑았고 덕분에 기분 좋게 서울까지 올라 올 수 있었다. 조잘조잘 이야기도 하고 좋아하는 유행가도 눈치보지 않고 들으면서 운전을 했다.  그 시간이 참으로 달콤해서 운전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시선이 뒷자리로 향하곤 했다. 


서울 집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다같이 저녁을 먹었다. 한 시간에 한 번씩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딸은 크게 엄마를 찾지 않았다. 짧게 엄마와 통화를 마치고 다시 자기 할 일을 했다. 나와 동생은 펜션에서 필요한 물품 리스트를 쓰면서 다음 날 아침 출발 계획을 짜고, 엄마가 없는 찬스를 이용해서 딸아이는 10시까지 눈치 안 보고 TV를 실컷 보았다. 10시가 조금 넘자 졸리다며 혼자 씻고, 이불로 쏙 들어가서 천사처럼 잠들었다. 이렇게 알아서 할 것을 뭐 그렇게 전쟁하듯 강압적으로 저녁마다 감정싸움을 했던 건지 지나온 그 시간들이 참으로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동생과 거실에서 자정까지 그래도 행복하다고 오랜만에 떠나는 여행의 설렘을 늘어놓았다. 아빠가 간암으로 투병할 때도 시간을 억지로 내서 여행을 많이 다녔다. 그렇게라도 작별인사를 충분히 하고 싶었다. 아빠랑 비교하면 엄마는 그런 호사를 누리지 못했다. 지금도 이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아빠가 떠나고 바로 찾아온 엄마의 위암 그리고 수술까지 바로 진행되었지만 너무 사는게 바빠서 크게 신경을 못 썼던 것이다. 홀로 얼마나 외롭고 겁이 났을지 상상하면 가슴이 아프다. 그렇게 방치 아닌 방치 상태로 5년을 이겨냈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치매가 찾아왔다. 엄마가 그나마 괜찮을 때 간 마지막 여행은 제주도 였다. 한 번도 간 적 없다는 말을 듣고 나는 동생이랑 우리 가족들 엄마를 모시고 제주도 여행을 갔다. 2박 3일 짧은 일정이지만 이것저것 많이 봤다. 그 때 엄마는 이미 상당히 치매가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는 몰랐지만 지나고 나니 이제는 안다. 제주도에 가서도 잠만 자려고 하고 가끔 멍하고 엉뚱한 말을 해서 우리를 화나게 했는데 그게 모두 아파서 그랬다는 것을 다음 해가 되고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치매와 싸우며 6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에는 여행다운 여행은 다녀온 적이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마지막 짐까지 다 확인하고 우리는 가평으로 출발했다. 도로는 막혀서 예정시간보다 시간이 더 걸렸지만 경치와 주변 분위기는 참 좋았다. 딸은 삼촌에게 이거저것 물어보고, 할머니한테 과자도 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나도 동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운전을 했다. 엄마는 변함없이 과자와 사탕을 달라고 손짓 했고, 어린 딸이 옆에서 잘 먹을 거리를 잘 조절해 주면서 할머니의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다. 


오후 2시경 도착한 펜션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키를 받아서 방으로 갔는데 숙소가 2층이었다. 높은 계단이 다소 걱정스러웠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다행히 내부는 사진처럼 넓고 복층으로 되어있었다. 

처음에 수영을 안 하겠다고 하던 딸이 다른 아이들이 재미있게 노는 것을 보고 마음을 바꿔 나는 딸과 함께 바로 수영장으로 향했고, 동생은 엄마 손을 잡고 밖에서 우리를 구경하다 주변을 산책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너무 평화로운 몇 시간을 보내고 우리는 야외 테이블에서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다른 곳으로 자꾸 가려고 하는 엄마를 잡고 있느라고 동생이 고생을 좀 했지만, 모두 청소기처럼 흡입하듯 맛있게 고기를 먹어 치웠다. 느긋하게 밖에서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낼 여건은 안되기에 빠르게 음식을 먹고 서둘러 숙소로 돌아왔다. 


한적하게 씻고 저녁에 간식까지 먹고 같이 앉아서 TV를 봤다. 모두 잠이 들면 늦은 밤 동생과 나는 같이 맥주 한잔 하기로 했다. 심심해하는 딸을 위해 그리고 지나가는 아름다운 시간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나는 딸과 밤 산책 다녀오고,  동생은 엄마와 모시고 실내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저녁 10시쯤 우리는 이른 저녁잠을 청하게 되었다. 배도 부르고 모두가 피곤하기도 했다. 내일이면 다시 내려가야 하는게 아쉽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복층에서 딸과 먼저 잠이 들었고, 중간에 조금 시끄러워 밑을 내려다보니 엄마가 새벽에 혼자 냉장고를 열심히 탐구하고 있었다. 동생은 그런 엄마를 모시고 침대로 돌아 가기를 몇 십 번 반복하고 있는 듯했다. 


어떠한 말도 안 통하고, 어떠한 것도 엄마를 막을 수 없는 아주 원초적인 본능만 남아있는 상태. 바로 그 상태가 현재 우리 엄마의 모습이었다. 보는 사람을 미치게 만들 수 있기에 수많은 분들이 요양원에 모시라고 우리 형제에게 수없이 말하곤 했다. 맞는 말이기는 했다. 엄마는 우리를 힘들게 한다. 하지만 엄마 본인은 전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날 밤도 동생을 힘들게 했지만 엄마는 순수해 보였다. 그렇게 나는 안타깝게 아래를 바라보다 다시 잠에 빠졌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갑자기 동생의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엄마 어딨어? 엄마! 엄마! 아이씨.." 


눈을 뜬 나는 순간 엄마가 혼자 나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2층이고 아주 가파른 계단이 있었다. 내려가다가 넘어지면 크게 다칠 것이 뻔했고, 밖에는 부슬부슬 비까지 오고 있었다.  나는 동생에 뒤를 따라 성급히 밖으로 나왔다. 딸에게는 금방 오겠다고 방에 꼭 있으라는 말만 남겼다. 그때까지만 해도 근처에서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동생과 길을 나눠서 엄마를 외치면 뛰어서 엄마를 찾았다. 15분이 넘게 찾아도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동생은 발을 절뚝이며 내게 엄마 봤냐고 물었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엄마를 외치는 우리를 본 펜션 사장님은 뭔 일이냐면서 상황을 물어보셨고, 자신이 엄마를 봤다고 만약 치매인 줄 알았다면 나가지 못하게 했을 거라면서 죄책감을 표현하셨다. 사장님은 인근 펜션에 모두 알려두겠다고 하고, 펜션 내부 CCTV를 확인해서 엄마가 나간 시간을 정확히 알려주셨다. 엄마는 새벽 6시가 조금 넘은 시간 밖으로 나간 것이었다. 우리가 엄마가 없어진 것을 발견한 시간은 아침 7시였다. 


찾고 찾다가 문득 1시간 정도 혼자 방에 있을 딸이 떠올랐다. 어린 딸이 받은 충격을 전혀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급하게 숙소로 올라가니 딸은 울면서 엄마랑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나는 간단한 짐을 챙겨서 딸과 함께 내 차로 이동했다. 길바닥에서 찾고 있는 동생을 찾아서 태우고 셋이서 차를 타고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생은 경찰에 전화를 걸어 엄마 실종신고를 했다. 사실 그때까지는 크게 불안하지 않았다. 하지만 목격자 중 한 분을 만났고. 그분이 말하길 엄마가 자신과 악수를 했고, 이후에 큰길 쪽으로 걸어갔다고 하셨다.  


펜션 건너에 큰길은 2차선이고 큰 차들이 고속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더 눈앞이 캄캄했다. 그 길 쪽으로 차를 운전하는데 혹시나 무슨 사고라도 났을까 봐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딸도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동생은 문을 잠그지 못한 것을 원망하며 스스로 자책하고 있었다. 급하게 나오느라 발톱이 부서져 발에서는 피가 나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구석구석 운전하며 살피기 시작했다. 다행히 도로에 사고 흔적은 없었다. 하지만 어디를 둘러봐도 엄마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시간 몇 분 흐르자  사고를 접수받고 출동한 경찰차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구급차, 소방차까지 주변에 보이기 시작했다. 중간에 잠시 경찰분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고, 다른 차들도 엄마를 같이 찾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우리를 안심시켜 주셨다. 하지만 몇 시간이 흘러도 엄마를 찾을 수 없었다.


동생은 내부에서 주변 CCTV를 찾아서 엄마의 행적을 찾는 형사분과 계속 통화를 이어갔다. 다행히도 엄마가 도로 나간 흔적은 없다고 연락이 왔다. 그 다리를 건너지 않았다면 분명 이 골목에 어딘가 계신다는 확신이 들었다. 문제는 어디에 계신지였다. 펜션 사장님도 계속 걸어 다니며 엄마를 찾고 또 찾아 주셨다. 

7시에 처음 없어진 것을 인지하고 3시간이 흘러 10시간 넘어가고 있었다. 같던 길을 수없이 반복하며 왔다 갔다 했고, 내려서 다른 펜션들 내부를 찾고 또 찾았다. 그렇게 모두들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엄마에게는 신원을 확인할 어떤 물건도 없었다. 목걸이도 불편하다고 해서 안 하고 다니고, 휴대폰 없이 지낸 지는 벌써 4년이 넘어간다. 누군가 엄마를 발견했다면 엄마는 말도 못 하고,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그런 상태이기에 더 걱정스러웠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다쳤다고 해도 그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하니 그것도 문제였다. 나쁜 생각은 최소한으로 하려고 했지만 사람이라서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그 생각들을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딸아이는 불안하지 계속 엄마와 통화를 했다. 한편으로는 괜히 여행을 와서 이런 꼴을 당한다고 후회스럽기까지 했다. 엄마 상태가 최악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이런 무모한 행동을 한 것이 미치도록 후회되었다. 만약에 먄약에 무슨 일 생긴다면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 뻔했다.


점점 차 안에 대화는 사라져 갔다. 반복적인 행동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4시간이 넘었고, 어쩌면 엄마가 여기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혹시 다른 사람 차를 탄 것은 아닐까? 등 우리는 떠오르는 불길한 생각들을 멈출 수 없어서 미쳐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경찰에서 연락이 왔다. 엄마를 찾은 것 같다면서 펜션 쪽으로 빨리 와달라는 것이었다. 반대쪽에 끝에 가 있던 우리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펜션으로 향했다. 


펜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밖으로 나오니 경찰차가 도착했고, 엄마는 그곳에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내렸다. 밖에는 계속 비가 오고 있었는데 엄마는 하나도 비를 맞지 않은 상태 었다. 


경찰관은 펜션 사장님이 정말 많이 도와주셨다며 찾게 된 배경을 설명해 주셨다. 주변 사장님들께 도움을 요청해서 가까운 곳을 추적하다가 엄마의 행적을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엄마는 바로 옆 500m 떨어진 펜션의 세탁실(창고)에 들어가 계셨다고 했다. 그래서 비를 안 맞고 피할 수 있었다. 우리는 차에서 모두 내려서 엄마를 부축이며 숙소로 향했다. 불안해서 떨고 있던 딸도 그제야 입을 열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해맑은 표정으로 숙소에 들어온 후 냉장고 문을 열기 시작했다. 나와 동생은 헛웃음이 나왔다. 어쩜 저럴 수 있을까? 싶기도 하면서 안도감이 몰려왔다. 만약이라는 두 글자를 그 짧은 시간 동안 몇 천 번은 더 떠올렸다. 


아마 큰 사고가 났다면 중증 치매 환자를 모시고 여행은 온 우리 형제가 미친 짓을 했다고 할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이 그러하다. 옛날처럼 모셔주는 곳이 없는 것도 아니고 사서 고생을 하는 우리를 보고 응원해 주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민감하게 반응하는 분들도 많다. 자발적 고문을 왜 하냐는 식의 냉정한 발언을 보면 때로는 반성하기도 한다. 게다가 즐기고 휴식하러 가는 여행에 1초라도 방심하면 안 되는 중증 환자를 데리고 간다는 것 자체가 납득 불가일지도 모른다. 


딸아이는 숙소로 온 후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엄마를 모시고 여행 가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사람이라서 모든 사건이 냉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또한 맞는 말이기에 반박할 마음은 없었다. 다만 충격을 받았을지도 모를 딸을 생각하니 마음이 쓰였다. 


우리 공간에 엄마의 모습을 확인하고 몇 십 분이 지나자 몸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너무 뛰어서 근육이 놀란 곳도 있었고, 어디서 인지 모르지만 상처가 난 곳도 있었다. 갑자기 피로와 배고픔까지 몰려왔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기에 충분히 그럴만했다. 나는 빠르게 아침을 차렸고, 우리 모두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빠르게 체크아웃 준비를 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참 좋은 추억만 남기고 떠났으면 좋았을 텐데 조금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엄마를 찾아서 다행이라고 여기며 차에 짐을 싣고 동생과 주변 마트에 가서 음료를 사서 돌아왔다. 


펜션 사장님께 감사의 마음을 표시해야만 했다. 어쩌면 남일처럼 여길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 만큼이나 고생해서 찾아주신 배려에 너무 감사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엄마를 찾기 위해서 노력해 주신 가평의 경찰, 구조대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다. 이토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실 거라고 사실 기대하지 않았다. 그것이 어디서 온 잘못된 인식인지는 모르나 그랬다. 그런데 이른 아침부터 정말 많은 노력을 해주셨다. 만약에 모든 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정말로 큰일이 날 뻔했다. 

모든 인사를 마치고 차를 돌려 서울로 향했다. 동생과 나는 뒷좌석에서 어린아이처럼 밝은 표정으로 우리를 주시하는 엄마를 보며 웃고 또 웃었다. 그 모습에 이유도 모르고 딸아이도 따라 웃었다. 그렇게 우리는 웃고 또 웃었다.


불과 500m 떨어진 곳에 엄마를 찾는 것이 이토록 어렵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에게 허락된 이 시간이 더 소중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곁에 있으면 그 소중함을 느끼기 어렵다. 너무 당연하고 너무 싶게 부모님에게 표현하고 돌아서서 후회하며 살아간다. 그 반복 속에 있는 것 같다. 나와 동일시하기에 그렇게 해도 된다고 착각하며 살기에 수많은 상처를 넘겼다는 것을 잃어버린다. 우리 형제는 이번 여행에서 잠시 벌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신경 써주라고 아직 시간이 허락하니 후회를 남기 말라고 말이다. 


이 글은 한참이 지나서 쓸 수 있게 되었다. 감정이 많이 정리되고 겨우 글로 표현할 수 있었다. 이렇게 짧은 글로 정리가 되지만 사실 엄청난 충격이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데 필요한 것은 시간이었다. 가끔은 너무 행복한 내용만 담아서 글로 쓰고 싶다는 욕심을 가져보기도 한다. 읽기만 해도 용기가 생기고 힘이 생기는 그런 글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일들이 싶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쓸 때 힘들기도 하다. 가끔 솔직함을 담아 글로 표현하면 다른 생각을 가진 독자분들이 날까롭게 지적해주시기도 한다.  그럴 수 있다. 쓰는 사람의 마음이 있다면 읽는 사람의 마음도 소중하니까. 


그런데 우울한 시간도 존재하지만 엄마를 보며 행복한 시간도 여전히 존재한다. 엄마는 정말 많이 밝아지셨다. 표현도 늘어나고 많이 웃는다. 그런 모습을 보면 엄마가 심리적으로 얼마나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물론 고생하는 다른 사람들의 희생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엉뚱한 행동에 우리 형제는 배꼽을 잡고 웃는다. 그 모습을 보고 엄마도 웃는다. 행복이 이렇게 전념되는구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앞으로도 슬픈 글을 더 많이 써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완치가 없는 병이기에 더욱 그렇고 그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그러기 하루하루가 더 소중하다. 그냥 특별한 일이 없어도 무사히 하루가 지나가면 감사하다고 느끼곤 한다. 엄마를 찾았기에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https://brunch.co.kr/brunchbook/mymotherstory

https://brunch.co.kr/magazine/dontforge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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