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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환 Sep 08. 2024

71. 엄마! 눈을 떠.

평범하게 산다는 것 그 자체가 복 받았다는 것을 잘 모르더라. 

'긴병에 효자 없다'라는 이 말이 참 가슴을 아프게 한다. 사람마다 모두 상황이 다르기에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말은 아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면 누구나 죽음으로 마침표를 찍기에 그 시작과 끝은 누구나 같다. 하지만 그 과정은 모두 다르다. 


'병'이라는 단어가 우리 형제 주변을 떠돌아다닌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잘 사용도 안 하는 페이스북에서 '13년 전 오늘'이라고 사진 한 장이 자동으로 업로드되었다. 그 사진은 13년 엄마 이름 앞으로 된 신축빌라에 이사하고 찍은 사진이었다. 나도 20대 후반이고 동생도 20대 중반 그리고 부모님도 50대 중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돈이 없어서 조금 불편했지만 아픈 사람도 없었고 나와 동생이 일찍 사회 전선에 뛰어들면서 항상 없던 돈은 조금씩 모이는 듯했다. 


조금 넓고 깨끗한 신축 빌라처럼 우리 가족 모두 앞으로 좋을 일만 기대했던 거 같다. 그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왜냐면 이후로 우리는 그리 행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빠가 만드는 작고 큰돈 문제는 어린 시절부터 항상 있던 일이라 큰일이 터져도 어쩌어찌 잘 수습했다. 그런데 오랫동안 혼자 해결하려고 온갖 걱정을 하던 아빠는 그 일이 수습되자마자 얼마 후 쓰러졌다. 


이미 몸은 암세포가 퍼져서 최악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아픔도 잊고 그래도 혼자 막아보려고 버티던 그 몸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렇게 12년 전 아빠의 암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한 순간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부모 복도 없던 우리 엄마는 남편복도 없었고, 인생에 복도 없었다. 


마음 짠하지만 그 짠한 마음도 치매라는 질병 앞에서 몇 분만에 무너져 버리는 게 현실이었다. 

남들은 청춘이라고 하는 60세도 되기 전에 치매 판정을 받고 급속도로 악화된 엄마는 초고속으로 자신의 인생을 끝을 향해 질주하는 것만 같다. 태연하게 지금의 모습이 엄마라고 받아들이려고 하고 현실을 수긍하지만 그조차도 쉽지 않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엄마에게는 우리 두 아들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복이 엄마에게 머물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자식복은 있는 엄마라서 조금은 덜 불쌍하다. 만약 이 상태인 엄마를 우리가 외면했다면 엄마는 일주일도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세상과 작별을 했을 것이다. 


오로지 먹을 것만 생각하고, 대소변에 대한 더러움도 모르고, 말도 못 하고 알아듣지도 못한다. 밖에 혼자 두었다면 집을 찾아오지도 못하고 쓰레기통의 음식을 먹고 또 먹었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이 모든 것을 감당하고 뒷수습을 하는 것이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을 앞둔 하늘과 저녁 바람이 아름답고 시원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아마도 거짓말일 것이다. 


자발적 퇴사 후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과정 속에서 큰 아들인 나는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몇 달을 보냈다. 아직 급여(실업급여)도 나오고 이전에 하던 공부나 취업준비의 연장선에 있지만 왠지 이 선택으로 인해 나중에 발생할 어떤 큰 일에 역할을 못하고 대처가 안될까 봐 두렵다. 


마흔이 넘어가니 마땅히 이런 마음을 속편히 나눌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인생의 고독을 조금은 배울 수 있었다. 게다가 내 입장에서 생각하니 나 또한 부모 복이 많다고 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 그렇다고 배우자 복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물론 어린 자식을 지식 논하고 싶지는 않고 내가 받을 것보다 그냥 건강히 잘 컸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래도 동생 복은 있는 듯하다. 그리고 동생이 지금의 여자친구와 결혼한다면 적어도 나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 것으로 기대가 되니 객관적으로 동생 놈이 나보다 복은 조금 많은 것 같다. 


아무리 친해도 모든 무거움 담고 동생과 이야기 하기는 힘들다. 종종 표현하고 말하기는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순전히 내가 감당할 내 인생이기에 많은 부분은 가슴속에 그냥 둔다. 그럼에도 우리 형제는 참 통화를 자주 하는 편이다. 


그날도 퇴근길에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퇴근해도 엄마를 바로 돌봐야 하는 이 삶을 산 지 벌써 1년이 되어간다. 얼마나 답답할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그리고 엄마는 참으로 본능에만 충실한 사람이 되어버렸기에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본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 아니다. 한 달에 몇 번 올라와서 보면 내 마음 참 답답하다. 빈 그릇을 들고 나와 손짓으로 냉장고 앞에서 서서 무한 시위를 한다. 과자를 주면 먹자마자 바로 나와서 같은 행동을 무한 반복한다. 아무런 말도 통하지 않는다. 냉장고가 열린 상태라면 배가 터질 때까지 감각도 모르고 먹고 또 먹는다. 생존을 위해 남은 단 한 가지 기능만 존재한다. 


바로 식욕이다. 그래서 변을 보면 설사가 많다. 제대로 된 음식물 섭취가 안되니 좋은 것이 나올 수 없다. 동생에게 행복한 순간은 엄마가 똥칠을 하지 않은 날이다. 동생은 엄마의 실수를 무슨 직장에서 벌어진 흔한 험담 스토리처럼 내게 풀어냈다. 


서서 변을 봤다는 이야기, 손에 묻었다는 이야기, 화장실 바닥이 엉망이라는 이야기, 출근 시간이 촉박했다는 이야기 등등 그런데 이 날 동생은 내게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했다. 


언어치료를 시켜드리는 것에 대해 내 의견을 묻고 있었다. 


순간 무슨 말을 하나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말도 못 하고 이상한 소리로 웃기만 하는 엄마인데, 게다가 뇌는 다 죽어서 겨우 기능을 발휘하는 상태인데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런데 동생이 말하길 엄마가 말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반복적인 패턴에 의해서 시키면 뭔가 될 거 같다고 말했다. 


결국 이야기는 엄마의 변으로 시작했다. 정신없이 씻겨드리는 그날, 엄마는 눈에 샴푸가 들어가서 고통스러워하며 강하게 저항했다고 했다. 빨리 머리를 감겨드리고 얼굴을 씻겨드렸는데 아직도 눈을 감고 있어서 동생이 엄마한테 "엄마! 눈을 떠!"라고 말하니 엄마가 끝의 "떠!"를 선명하게 따라 했다고 했다.


혹시나 해서 몇 번이나 반복을 했는데 "눈을"이라는 예령을 듣고 이어서 엄마는 "떠"라고 대답을 한다고..

그 상황이 잘 그려지지 않았지만 동생은 다음 날 영상 통화로 엄마가 말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본인도 머쓱한지 "떠"라고 말하고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동생도 웃고 영상을 보고 있던 나도 웃었다. 


이렇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엄청 행복한 가족처럼 보였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형제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엄마가 노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별로 웃을 일도 없어서 무색의 도화지 마냥 살아가는 자식들이 안쓰러워서 그래서 죽어가는 남은 세포하나까지 써서 우리가 눈을 이라고 말하면 "떠!"라고 밝게 대답하는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을 잠시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외면한다고 벌어진 일이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완벽하게 잊고 지낼 수도 없다. 그럼에도 버겁고 무겁다. 살아가다 보면 살아지겠지만 그럼에도 말이다. 좋은 팔자를 타고나서 좋은 일만 생기는 사람이 몇 번이나 있을까? 위안을 하며 우리 형제는 그래도 좋은 부분만 이야기하려고 애를 쓴다. 그리고 우리는 잘 안다. 남들이 말하는 그 환상적인 좋은 일들이 아니라도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정말 좋은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냥 그냥 하루하루 너무 흔하고 평범해서 표가 나지도 않는 그런 삶이 얼마나 어려운 삶인지 충분히 알기에 앞으로 남은 삶은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냥 적당한 나이에, 적당한 친구들, 적당한 몸상태로, 남에게 짐이 되지 않고 소소한 취미나 일을 하면서 그냥 그냥 늙다가 조용히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고 사라질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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