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는 중환자실은 지옥처럼 싸늘했다. 20분 짧은 면회시간을 맞춰서 세 번 방문하면서 문 앞에서 초조하게, 아니 어쩌면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으로 손을 씻고 들어가는 다른 가족들과 마주쳤다. 이곳에 오게 된 환자분들의 사연은 모두 다르겠지만 적어도 보호자들의 표정은 비슷해 보였다.
출입기록부에 이름을 적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움직여서 엄마 앞에 서면 알 수 없는 감정들이 가슴 어딘가에서 올라왔다. 중증 치매여도 활동이 가능했던 며칠 전의 삶과 지금은 삶은 절대 같다고 표현할 수 없었다. 이토록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데 한때는 바보처럼 나쁜 생각을 하곤 했다.
'이제 우리 형제 좀 그만 괴롭히라고.. 충분하다고.. 엄마가 아니어도 이 세상 살아남기가 너무 버겁다고....'
이딴 나약하고 이기적인 생각을 나는 많이 했다. 무엇보다 힘든 건 엄마일 텐데 십 년 이십 년이 된 것도 아닌데 힘들다고 투정 부리는 꼴이 참 못났다고 생각했었다.
엄마는 우리 형제를 없는 형편에, 가사를 도와주지는 않는 아빠에, 친정엄마라고는 자신을 버리고 성인 되어 불쑥 나타났지만 도움도 안 되는 상황에, 그럼에도 두 아들이 거지꼴로보이지 않게 하려고 온갖 애를 쓰며 키워냈다.
물론 우리 형제가 남들이 말하는 정말 엄청난 사람으로 성장한 것은 아니다. 보통사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어른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스무 살부터 밖에 나가서 이리저리 치이면서 일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겁쟁이로 자라지는 않았다. 덕분에 그래도 지금은 사람 흉내를 내면서 때로는 아직도 자리 잡지 못하고 앙상한 가지 같은 부모님의 열매를 탐닉하는 그런 사람들보다는 더 괜찮은 인생을 살아내고 있다고가끔은 위로했다.
이 모든 게 엄마의 사랑과 보살핌 그리고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우리를 감쌌기 때문이라는 것을 어설픈 마흔이 되어서야 나는 겨우 깨닫기 시작했다.
엄마가 쓰러지고 정말 정신없이 바빠진 것은 내가 아니라 사실 동생이었다. 내 나이 이십 대 후반 아빠가 암으로 투병할 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동생은 최선의 최선을 찾아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나는 그런 동생의 결정을 존중했다. 내 몸이 지쳐서 그런 것이 아니고 합리적인 판단을 하기 위함이고 그래도 병원 쪽에서 일하는 동생의 말이 더 옳은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일주일 정도 입원하고 이제 일반병동으로 내려가도 좋을 것 같다는 의사의 답변을 들었을 때, 동생은 이렇게 아무런 수술이나 치료를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자신이 일하는 병원에 모시는 것이 더 좋다고 내게 말했다. 그리고 원장 선생님께 연락하고 더 좋은 병실과 간병인분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의 뇌출혈과 치매는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수였다. 물론 병이 나아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기에 최대한 마음 편하게 모시고 엄마를 자주 볼 수 있는 곳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동생이 일하는 병원의 사람들은 참으로 따뜻한 분들이라 더 마음이 놓였다.
퇴원 수습이 끝나고 구급차를 불렀다. 이제는 내가 운전하는 차에 탈 수도 없는 이 현실이 미치도록 원망스러웠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구급차의 작은 침대에 엄마를 눕히고 벨트로 몸을 고정시키자 답답하다는 듯 온전히 움직여지는 왼쪽 발가락을 엄마는 계속 움직였다. 마치 답답해서 미치겠다는 말을 발가락으로 하는 것만 같았다.
'어떤 느낌일까?'
어제까지 온전히 내 생각과 의지대로 아무런 저항 없이 움직이던 내 몸뚱이가 나와 분리되어 떨어져 나간 그 느낌. 아무리 상상해도 어떠한 결론에 도달할 수 없었다. 어디가 조금만 아파도 불편한 게 우리 신체인데 그 좌절감은 무슨 문자로도 표현이 불가능했다.
답답함과 좌절감 그리고 익숙함과의 작별은 시간이 필요한 문제였다. 엄마에게도 치매에 이어 두 번째로 적응의 시간이 주어졌고 그것은 엄마 혼자 오로지 감당해야 했다.
엄마가 탄 구급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와 동생도 뒤를 따라 움직였다. 절대로 웃을 일이 없는 상황에서 주고받는 농담은 차갑고 엄숙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울고 있을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인지라 그냥 헛소리를 하면서 병원까지 이동했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엄마를 병실까지 이동시켜 주셨다. 젊어 보였다. 문득 이런 일을 하시는 분들은 얼마나 힘들까 싶기도 했다. 이렇게 누워서 도로를 움직이는 상황은 인생을 살면서 그다지 많지 않기에, 이송하시는 분들이 만나는 환자분들의 상태가 좋을 일 없었다. 어쩌면 이 일이 보람을 느끼실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니면 삶이 어둡고 칙칙한 회색으로 보이거나.
엄마는 일반병동 4인실로 옮겨지셨다. 총무과 팀장인 동생과 예전에 일 년 넘게 입원했던 엄마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분들이 나타났다. 모두 엄마의 모습을 보고 어떠한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괜찮아지실 거라는 위로가 허공을 날아다녔다. 애써 괜찮은 척하며 나는 동생한테 물어필요한 물품을 사러 주변 마트로 향했다. 잠시 벗어나고 싶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현실도 싫었고, 아픈 엄마를 바라보는 것도 싫었다. 그리고 가망 없는 환자라도 괜찮아질 거라고 말하는 그 위로가 썩 좋지 않고 불편했다.
오랜 시간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내 마음이 사막처럼 변한 것만 같았다.
기저귀, 물티슈, 수건, 빨대컵 등등 장바구니는 물건을 채워지고 있었다. 마음이 차분해지고 진정이 되는 듯했지만, 낮 시간대에 엄마보다 훨씬 나이가 드신 분들이 여유 있게 장을 보는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각자의 인생이 있는 것이겠지만 모든 것이 주어진 팔자라지만 그래도 납득이 되지 않고 억울했다.
무엇이 그리 못마땅해서 저런 하찮은 평범조차 허락하지 않는지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병원 문을 열고 들어 커튼을 거두니 엄마는 잠을 자고 있었다. 피곤했다는 듯이 깊은 잠에 빠진 엄마를 보니 참았던 눈물 한 줄이 조용히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