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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아픈 엄마를 남겨두고 처음으로 방문한 친척집

내게 사라 졌던 명절을 다시 찾기로 했다.

by 고용환

아마도 스무 살 무렵이었던 거 같다. 아빠 없이 엄마를 모시고 친척집을 가기 시작한 것이. 자영업 실패 이후 쉽게 자리를 잡지 못하던 아빠는 자신이 해오던 가정의 역할을 하나씩 내려놓기 시작했다. 아빠가 내려놓을 때마다 나는 그것을 주워서 내 짐가방에 차곡차곡 넣었다. 그 무게감이 어떤 것이 알지도 못한 채, 그냥 무능함을 원망하는 철없던 시절이었다.


운전면허를 일찍 딴 나는 벼룩시장을 찾아 바퀴가 달린 것만 확인하고 싸구려 중고차를 샀다. 마트에서 과자 사듯이 아무런 생각 없이 사버린 자동차는 그래도 제법 굴러다녔다. 큰 아들이 기동력이 생기자 엄마는 몇 년 동안 참았던 것들을 나를 통해 하기 시작했다.


그중에 하나가 명절 때 친척집에 가는 것이었다. 한참 놀고 싶은 나이였지만 17살부터 사회생활을 해서 그런지 오히려 엄마와 동생을 데리고 친척집을 가는 것이 더 좋았다. 일 년에 두 번 서로의 생존과 안부를 확인하며 오고 가는 근심과 걱정을 옆에서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내가 엄마의 정식 기사가 되자, 아빠는 큰일이 생기지 않으면 친척집을 가지 않았다.


항상 일하러 간다고 나갔고, 집에 없는 시간이 늘어났다. 타고난 천성이 어디 한 곳에 잘 붙어있지 못하는 아빠는 마치 자유를 얻은 한 마리 철새 같았다.

그렇게 나는 엄마의 치매가 심해져 처음으로 요양원에 가시 전까지 모시고 다녔다. 이후에도 수많은 일이 생겼고, 5년이라는 시간은 밤하늘의 어둠처럼 한 순간에 우리 형제의 시간을 검게 만들었다. 엄마가 한 사람으로 정상적인 기능을 못하게 된 순간부터 나는 친척들의 모든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없었다. 아빠를 하늘로 보내고 경조사에서 점점 멀어진 것도 있지만 그래도 종종 누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정도는 엄마를 통해 들었다.


남의 일에 크게 간섭을 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엄마는 인정이 정말 많았다. 경조사를 챙기려고 노력했고, 형편이 좋지 않아도 언제나 과하게 돈봉투를 채워 넣었다. 어린 시절 잠시동안 자신의 핏줄과 출생에 대해서 잃어버리고 살아서 그런지 엄마에게 핏줄은 뭔가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2020년부터는 자주 가던 이모네 집에도 가지 못했다. 미안하고 죄송스러운 마음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짧은 전화통화였고, 이모도 우리 형제의 상황을 알기에 서운하다는 표현을 하지 않았다. 친척집을 가지 않으니 명절은 그냥 의미 없는 휴일의 연속이 되었다. 배우자마저 외국인이라 찾아갈 곳도 없었다. 그렇게 나에게 명절은 조용히 사라졌다.


사실 올해 추석도 별 생각이 없었다. 설날은 이사를 하느라고 정신없어서 무엇을 챙길 틈도 없었고, 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 다시 입원했기에 더욱이 어디를 모시고 가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그래서 그냥 멍하니 달력을 바라보았다.

남들은 해외여행이나, 가족여행 등등 길고 긴 2025년도의 추석을 좋아하며 환영하는데 내 마음은 고요하다 못해 이 심심한 휴일을 어찌 보내나 괜한 걱정까지 했다.


추석 연휴를 일주일 정도 앞두고 딸에게 책을 읽어주다가 딸이 내게 물었다.


"아빠, 우리는 친척이 없어?"


그 순간 나를 할 말을 잃어버렸다. 잠시 멍한 상태로 있다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얼마나 대가족인지 설명했다. 그리고 5년 전에 네가 어릴 적에 몇 번이나 다녀왔다고 말했지만 딸의 기억은 하얀색 백지 그 자체였다. 나는 문득 내가 놓치고 산 것들에 대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것들이 아니었다.


자신을 잃어가고 있는 엄마 곁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나도 많은 것을 잃고 있었다. 그래서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이번 추석에는 시간을 내서 친척집을 가보자고 말했다. 엄마가 병원에 누워 계서도 얼굴 뵙고, 밥도 먹으면서 그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딸아이와 동생 그리고 나, 우리 셋은 차를 타고 이모네 집으로 향했다. 엄마랑 며칠 동안 떨어지는 것을 조금 걱정스러워했지만 딸은 내 손을 잡고 궁금한 친척집에 가겠다고 했다. 이모는 우리 얼굴을 보며 엄마에 대한 짧은 안부를 묻고는 더 이상 엄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슬퍼하지 말자고 선언하는 듯했다. 걱정 대신 우리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었다며 상다리가 부셔지도록 음식을 올려놓으셨다. 큰 상에 앉아서 누나들과 조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모서리 한 곳에 시선이 갔다. 언제나 부엌 가까운 곳에 앉아서 이모를 거들며 유쾌한 농담과 유머로 친척 누나들을 웃게 만들었던 작고 강한 여자인 엄마가 떠올랐다. 그 빈자리가 명절이라서 그런지 더 크게 느껴졌다.


엄마의 빈자리는 딸의 수줍음과 돌발행동으로 조금씩 메워졌다. 그렇게 더 이상 음식이 먹을 수 없을 때까지 먹고 또 먹으며 추석을 보냈다. 이모집을 나설 때, 산 사람을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너희들 잘 챙기라고 이모는 우리의 두 손을 꼭 잡았다. 그 거친 손에는 자기 동생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생각하지 못한 거금을 받은 딸아이는 두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행복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친척집에 가서 어색함을 이겨내면 이렇게 큰돈이 생긴다는 것을 배웠다는 듯이 조금은 어른스러워진 것 같았다. 아직 너무 어려서 어른들의 삶을 그 무게를 알 수 없는 작고 작은 딸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자기가 키워낸 자식이 낳은 자식이 커가는 모습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 부모님이 떠오르며 그들의 인생이 참으로 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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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고모네 집에 가서 친척들 사이에 둘러싸여 윷놀이도 하고, 식사도 하면서 아빠 핏줄 속에서 또 다른 하루를 보냈다. 나이를 먹다 보니 누구에게나 떠나보낸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돌아가신 고모부와 아빠에 대한 이야기도 종종 흘러나왔다. 표정은 모두 담담했다. 보고 싶다고 말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길을 건너간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해졌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의 대화 속에 영원히 살아있었다. 고모와 누나들도 엄마에 대한 이야기 가급적 입에 올리지 않았다. 홀로 병원에 누워있는 그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들었다. 나는 고모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누나들이 낳은 자식들 사이에 둘러싸여서 어린아이들을 쓰다듬으며 인생의 행복을 담아내고 계셨다. 많이 부러웠다. 우리 엄마도 이렇게 행복을 담았어야 했는데 그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내속을 뒤집어 놓았다. 돌덩이 하나가 가슴에 깊이 박힌 것처럼 아펐다.


마지막 날, 우리는 엄마의 병원으로 향했다. 휴일이지만 물리치료를 받으러 치료실에 가 있었다. 반신이 마비가 된 치매 환자, 자식들이 많이 찾아오는 치매 환자, 보통 환자들보다 스무 살이나 어린 젊은 여사님 등 엄마는 여러 가지 이름을 병원에 존재했다. 조금 걸린다는 소리를 듣고 우리는 아래층 카페에 가서 엄마를 기다렸다. 한 시간쯤 흘러 다시 병실로 올라가니 엄마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언제나처럼 엄마의 한쪽 코를 막고 있는 그 투명한 호수가 가시처럼 내 목과 눈물샘을 찔러댔다. 나는 잠시 눈문을 삼키고 밝은 표정으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는 나와 동생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작고 작은 천사인 손녀딸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소를 지어 보냈다.


딸아이는 아주 작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 빨리 나으세요."


엄마는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두 눈을 감고 무표정한 얼굴로 답변을 대신했다. 병원에 오랜 시간 머물지는 않았다. 급한 일이 있어서 발걸음을 재촉한 것은 아니었다. 견디기 힘들어서 벗어났다고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엄마를 마주하면 느낀 슬픔을 고속도로 위에 던져버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래야 또 내일을 보낼 수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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