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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혁 Nov 18. 2021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

 이 세상의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 영원할 것만 같은 태양의 빛도 언젠가는 사라진다. 생명체 역시 마찬가지다. 다세포 생물이라면 체내에서 계속해서 세포가 죽고 새로 생겨나지만, 결국은 노화되어 더 이상 생명 활동을 지속하지 못해 생을 마감한다. 인간은 현재 지구 전체를 지배하며 뛰어난 과학적, 인문적 발전을 이룬 전례없는 종이나, 분류학적으로 보면 지구의 수많은 종 중 하나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지구를 방문했던 모든 이들과 같이, 언젠가는 떠나게 된다. 크고 작은 하나의 발자국을 남기면서 말이다. 우리는 이들의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듣고 볼 수는 없으나,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통해서, 혹은 네트워크에 흘러넘치는 지식의 일부를 통해서 접할 수 있다.


 이렇게 그들의 이야기를 접할 때면, 죽음이라는 것은 단순히 남의 나라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은 나이를 먹으며 점차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인지하게 된다. 유아기나 청소년기에는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한다. 교과서에 나온 위인들이 어느 년도에 태어나 어느 년도에 사망했음이 적혀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산수의 다른 수많은 숫자들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자료로 인식할 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하지만 점점 어른이 되어갈수록, 자신 곁의 가까운 사람들이 사라지게 된다. 원하면 언제든 연락할 수 있고, 시간이 나면 얼굴을 보며 즐겁게 식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이 세상 어디에서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충격적인 일은, 그 충격이 너무나 큰 나머지 오히려 아무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기도 한다.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서이다. 당장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버튼 하나만 누르면 다시 대화할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눈앞의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무의식 어딘가에 남아, 어느 순간 무의식의 저편에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사별한 뒤에도 아무 문제 없어 보여 이상하게 느끼던 사람이 갑자기 극심한 실의에 빠지거나, 모든 것에 의욕을 잃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유쾌한 대중연설 과학자로 알고 있는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도 사랑하는 연인 알린을 결핵으로 떠나보낸 뒤 학자 동료들에게 그녀는 죽었다며 덤덤히 이야기하였지만, 파인만이 알린이 세상을 떠난 이후 썼던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946년 10월 17일


사랑하는 알린에게


당신을 정말 좋아해, 내 사랑.


이 말을 들으면 당신이 얼마나 좋아할지 알지만, 당신이 좋아해서 이 편지를 쓰는 것만은 아니야. 당신에게 이걸 보낸다 생각하니 온 몸이 따뜻해지는 것만 같아.


마지막으로 쓴 이후 끔찍이 긴 시간이 지났네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쓰지만, 내가 얼마나 고집 세고 현실적인 사람인지를 아니 당신은 이해해줄 거라 믿어. 그리고 난 글쓰기에 영 소질이 없으니까.


그래도 내 사랑, 나는 여태까지 항상 해왔던 일이자, 지금 미루고 있는 일을 다시 하는 것이 맞다는 걸 알아. 당신한테 말해주고 싶어. 당신을 사랑하고, 사랑하고 싶고, 언제나 사랑할 거라는 거.


......


리처드가.


추신. 내가 이 편지를 보내지 못하는 걸 이해해줘. 난 당신의 새 주소를 모르는걸.



 사람의 사고는 꼬리에 꼬리를 물며 연속적으로 이어지기에, 결국은 죽음이라는 것이 자신에게도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결국 인지하게 된다. 지금 즐기고 있는 것들을 더 이상 즐기지 못하게 되고, 건강하기만 한 육체가 늙고 쇠약해져 결국 영원할 것만 같은 순간이 끝나버리는 죽음은 극도로 공포스러운 대상이 된다. 사람에 따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시기는 다르겠지만,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이상 대면할 수 밖에 없는 순간이 오게 된다.


 특이하게도, 본인은 유별난 아이여서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유치원생일 시절에 죽음에 대해 처음 생각해보았다. 그 무렵에는 굴러다니는 먼지도 신기해할 만큼 세상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가지는 시절이었기에, 죽음이라는 공포의 대상조차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진지하게 그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은 학창 시절 힘든 일을 겪을 때였다. 중학교까지는 언제나 묵묵하게 주어진 일을 착실히 해내는 모범적인 우등생이었으나, 자율형사립고등학교에 들어갈 때 갑작스레 고장나버렸다. 자신조차 인지하지 못하던 축적된 스트레스에 새로운 기숙사 환경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학업 난관이라는 극심한 스트레스가 덮쳐 폭발해버리고 만 것이다. 


 영원히 공부할 수 있을 줄 알았던 나는, 글씨조차 제대로 읽지 못하게 되었다. 가장 잘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공부를 한 순간에 할 수 없게 되자, 극심한 공포에 빠졌다. 언제나 상황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한 믿음이 한순간에 깨져버린 것이다. 그러한 공포는 곧 현실에 대한 도피로 이루어졌다. 괴물이 쫓기는 사람처럼 정신없이 도망쳤다. 따라잡힌다면 정말로 끝이라 생각했기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내달렸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황량한 사막에 홀로 남아 있었다.


 나는 한순간에 고등학교를 며칠 만에 나오고, 오락에 빠져 모든 것을 내팽개친 채 꾀병을 부리는 중독자가 되었다. 칭찬하고 대견해하며 지지해주는 사람들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없었다. 주변의 이들은 그저 싸늘한 시선으로 한심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더 이상 나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어제의 호화롭고 아늑한 세상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듯이 신기루처럼 바람에 흩날려 사라지고 말았다.


 당시에는 정말 심각한 상황이라고 느꼈다. 마치 불바다 위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안전한 울타리에서 튕겨져나온 가축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아무런 경제적 가치도 없는 가축이었다! 학교라는 작은 우물 안에서는 뛰어난 인재였는데, 어떠한 사회 안에도 속하지 않은 채로 마주한 거대한 사회에서는 그저 불량품에 불과했다. 일을 해본 것도 아니었고 눈치가 빠른 것도 아니었으며, 글도 제대로 못 읽는 불량아였다. 실의에 빠져 하루하루를 보냈다. 2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오락만을 붙잡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더욱 한심하게 바라보았을 것이다. 문제를 해결할 생각은 안 하고 현실 도피라니! 한심하게 느끼는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나의 몸은 더할 나위 없이 편안했지만, 정신은 불구덩이에서 바베큐 가지에 묶인 채 웰 던으로 익어가는 느낌이었다.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싶어도 기초적인 산수조차 제대로 못하고, 글을 읽자니 문장 하나를 읽는데 5분이 걸릴 정도였으니 짧은 인생동안 책과 펜만 붙잡고 살았던 나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는 악몽이었다. 매일 집에 들어와 침대에 누울 때마다, 내일 일어나지 못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수없이 하곤 했다. 이대로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내세는 믿지 않았기에, 죽게 된다면 더이상 어떤 것도 할 수 없고, 심지어 이런 생각조차 못하게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하지만 더 두려웠던 것은 이후의 나에 대한 평가였다. 이대로 내가 죽는다면, 다른 이들은 필히 게임에 빠져살다 객사한 불쌍한 친구로 생각할 게 분명했다. 내가 학원, 집, 도서관을 다니며 자나깨나 공부뿐이었던 때 놀고먹을 생각밖에 하지 않았던 동창이 이후에 나보고 한심하다고 했던 기억이 나자 갑작스레 공포를 넘어서는 극심한 화가 치밀어오르기 시작했다. 


'네가 뭘 안다고 나에게 감히 그런 말을 해!'


 당시에는 어떤 원대한 목표가 있어서보다 화를 도무지 주체할 수 없어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대로면 공포심이 아니라 화병으로 쓰러져 몸져누울 것이 자명해보였다. 공부에 한이 맺힌 귀신이 될지도 모를 터였다. 다른 것은 다 참을 수 있었지만, 노력해보지도 않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나에게 비상식적인 지적을 하는 것만큼은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다른 이가 큰 돈을 주고 사겠다고 하는 계정을 삭제해버리고 이전에 가르침을 받던 학원 선생님들에게 다시 찾아가 부탁해, 당해 치러지는 수능까지 정신없이 공부하였다(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꽤나 재밌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공부를 처음 해보았기에, 새롭게 배우는 내용들은 흥미진진해서 하루종일 해도 질리질 않았다). 지병으로 인해 시험을 잘 치르지는 못했지만,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라고 느낀다.


 물론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위기가 있었지만, 그 시절의 위기에 비하면 호수의 작은 일렁임에 불과한 것들이었다. 오히려, 그런 과정들을 통해 죽음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볼 기회가 있었다. 살아야만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 사고할 수 있었기 때문에,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시간이 날 때마다 서점에 틀어박혀 관심 가는 대로 책을 읽었다. 인문학, 철학, 과학, 사회, 역사....눈에 보이면 그저 사서 읽었다(지금까지 책을 산 돈으로 대학교를 10년 다녀도 돈이 남을 것이다. 전적으로 지지해주시는 부모님이 아니었다면 이미 거리에 나앉았을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그 각각의 책들은 나에게 어떠한 명쾌한 해답도 제시해주지 못했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해 깊게 사고할 수 있을 정도록 나의 정신을 성장시켰다.

 

 스무 살의 나는 그 문제에 대해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실마리조차 잡을 수 없어 무의식의 한 공간에 무심하게 던져둔 채 자연스레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 것은 파인만의 일생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였다. 사실 책이라기보다는 만화였다. 물리학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무지했기 때문에, 물리학 책은 흑과 백의 명암 차이만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글자들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는 이야기이다).

 파인만이라는 사람은 내가 생각한 학자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였다. 그야말로 정태제의 반대인 안티태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인슈타인이나 노벨과 같이, 존엄함을 넘어 경이로움마저 깃든 절대적으로 보이는 공식들을 적지 않았다. 그는 과학은 간단하고 그림을 그려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며 곡선과 직선으로 그림을 그린 것이다!(나중에 찾아보니 이는 파인만 다이어그램이었다. 양자전기역학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후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는 그의 뛰어난 업적에는 큰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그 책은 파인만의 과학적 업적이 아니라 인간 파인만의 일생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에 흥미를 끌었다. 


 짧은 책이었지만, 그것은 지금까지 읽었던 수 천권의 책들 중에서도 가장 큰 울림을 주었다. 물리학자들은 서적과 논문종이들의 산에 둘러쌓여 평생을 머리를 싸매며 살다 불행하게 인생을 보내는 줄 알았건만, 그는 천재적인 물리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태어난 한 개인으로써 충실하고 재미있게 인생을 살다 갔다. 과학자도 이렇게 재미있게 인생을 살 수 있다니! 이는 과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하는 삶에 대해 회의감을 가지고 있던 나에게 있어 큰 충격이었다. 무엇보다도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였다. 그는 자신의 차례가 되었을 때, 자신에게 끝이 왔다는 그 사실을 덤덤히 받아들였다. 죽음조차 그가 자신의 인생을 즐기는 것을 방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대중들에게 강연을 하고 여행을 하며, 큰 발자취를 남기고 미지의 영역으로 떠났다.



 그의 이야기를 읽고 나니 갑작스레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실 크게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죽음은 생명체로서 누구도 피해갈 수 없지 않은가. 생물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써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이를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도. 이미 고대에 절대권력을 가졌던 중국의 황제도 결국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지 않나. 백방으로 노력하여도 어찌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 신경을 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또한, 삶에 끝이 있기에 내가 지금 이 순간을 가치 있게 여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내가 죽음 없이 평생 젊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면 지금 당장 노력해야 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지구가 태양을 수십 바퀴, 수백 바퀴 돌고 난 이후에 시작해도 아무런 후회가 없을 것이다. 시간의 유한성이라는 것이 우리의 인생에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지고, 현재의 힘든 순간들에도 크게 연연해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역경에 좌절이나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천을 울리는 폭풍은 언젠가 잦아들고, 평야에는 언제나처럼 고요가 찾아와 봄바람이 풀잎을 사르르 간지럽힌다. 힘든 순간도 긴 인생이라는 구불구불한 곡선의 찰나의 한 점일 뿐이다. 그 점과 점이 모여 인생 곡선을 그리게 된다. 한 점에서만의 미분값, 그러니까 기울기로 곡선이 어떻게 그려지는지 알 수 없지 않은가? 또한, 한 부분에서의 실패가 나의 인생의 실패라는 명제를 증명할 수 없다. 수많은 부분으로 구성되는 나 자신의 한없이 작은 한 원소로 나라는 집합을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아들이고, 누군가의 학생이고, 홀로 선 개인이기도 한 스스로는 수많은 단면을 지닌 다면체와 같다. 한 면에서 보았을 때 그것이 정삼각형이라고 나를 정사면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타인이 나에 대해서 내리는 평가에 크게 연연해하지 않는다. 코끼리의 다리를 만지고서 기둥이라고 주장하는 맹인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재미있고 유쾌하다.


 수많은 단면을 지닌 것은 우리 세상도 마찬가지다. 다만 우리는 관점의 한계로 인해 수많은 면을 가진 세상을 한쪽에서만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선천적 유전자, 후천적 경험을 통해 성장해왔고, 성장해갈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관점을 가진다. 각자의 시선으로 하나의 세상을 바라보기에, 우리는 모두 제각기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모양을 달리한다. 세상은 개인이 그 세상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이는 냉소로 가득찬 세상에 살고, 희망적으로 바라보는 이는 세상의 희망적인 면을 바라보며 산다. 세상을 바라보는 개인의 관점은 고유성을 가지며 변동성 또한 가진다. 생각과 경험을 통해 자신이 다른 관점을 가지기로 마음 먹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갈 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건 이런 의미가 아닐까?



 결국 성인의 제 1원칙인 선택과 그에 대한 책임이라는 간단한 문제로 회귀하게 된다. 어느 먼 훗날, 혹자가 나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물어볼지도 모른다. 이는 이 글을 읽는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나의 대답은 이렇다.





 "죽음은 인생에 끝맺음을 지어줌으로써 그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탄생이자 소멸이다."






 








October 17, 1946


D’Arline,


I adore you, sweetheart.


I know how much you like to hear that — but I don’t only write it because you like it — I write it because it makes me warm all over inside to write it to you.


It is such a terribly long time since I last wrote to you — almost two years but I know you’ll excuse me because you understand how I am, stubborn and realistic; and I thought there was no sense to writing.


But now I know my darling wife that it is right to do what I have delayed in doing, and that I have done so much in the past. I want to tell you I love you. I want to love you. I always will love you.


I find it hard to understand in my mind what it means to love you after you are dead — but I still want to comfort and take care of you — and I want you to love me and care for me. I want to have problems to discuss with you — I want to do little projects with you. I never thought until just now that we can do that. What should we do. We started to learn to make clothes together — or learn Chinese — or getting a movie projector. Can’t I do something now? No. I am alone without you and you were the “idea-woman” and general instigator of all our wild adventures.


When you were sick you worried because you could not give me something that you wanted to and thought I needed. You needn’t have worried. Just as I told you then there was no real need because I loved you in so many ways so much. And now it is clearly even more true — you can give me nothing now yet I love you so that you stand in my way of loving anyone else — but I want you to stand there. You, dead, are so much better than anyone else alive.


I know you will assure me that I am foolish and that you want me to have full happiness and don’t want to be in my way. I’ll bet you are surprised that I don’t even have a girlfriend (except you, sweetheart) after two years. But you can’t help it, darling, nor can I — I don’t understand it, for I have met many girls and very nice ones and I don’t want to remain alone — but in two or three meetings they all seem ashes. You only are left to me. You are real.


My darling wife, I do adore you.


I love my wife. My wife is dead.


Rich.


PS Please excuse my not mailing this — but I don’t know your new add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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