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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원릉健元陵의 사초莎草로 쓰인 물억새와 ‘달 완薍’

훈몽자회의 옛 말 '달'은 '물억새'이다

by 경인

“건원릉健元陵 사초莎草를 다시 고친 때가 없었는데, … 원래 태조의 유교遺敎에 따라 북도北道의 청완靑薍을 사초로 썼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다른 능과는 달리 사초가 매우 무성하였습니다.”* (인조실록)


16세기 전반 문헌인 『훈몽자회』에서는 갈대를 뜻하는 로蘆, 위葦, 가葭에 대해 “갈”이라는 훈을 달고 있고, 완薍, 적荻, 환雈에 대해서는 “달”이라는 훈을 달고 있다. 나는 이것을 보고 우리 옛 말 ‘달’이 물억새를 뜻할 것이라고 추정해왔다. 왜냐하면 완薍과 적荻은 『중국식물지』 등 여러 문헌을 검토해보면 물억새(Miscanthus sacchariflorus)를 뜻하기 때문이다. 좀더 정확히 『훈몽자회』를 인용하면, “薍 달 란 葦屬或謂之荻(갈대 종류이며, 적荻이라고도 한다)”, “荻 달 뎍 雈也俗呼ㅣ子草(환雈이다. (중국)민간에서 적자초荻子草라고 한다.)”, “雈 달 환” 등으로 물억새를 뜻하는 글자의 훈으로 한결같이 ‘달’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훈몽자회-광문회간-갈과달.jpg 훈몽자회의 '달 (조선광문회 간)
건원릉 (2025.10.23 구리 동구릉) - 봉분의 물억새가 보인다.


몇 해 전부터 나는 ‘달’이 ‘물억새’일 것이라는 추정을 확인하기 위해 조선시대 문헌에 기록된 실 사례를 찾아보았다. 그 과정에서 발견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위 인조실록의 1629년 3월 19일자 기사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건원릉의 사초로 쓰인 억새를 ‘완薍으로 표기하고 있고, 당시 ‘완薍’의 훈은 ‘달’이므로, 건원릉의 식물이 무엇인지 확인하면‘달’이 무엇인지 분명해질 것이다. 그래서 작년 말부터 건원릉에 한 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게으름에 미루고 미루다 오늘, 맑은 가을 날 친구와 함께 동구릉으로 향했다.


건원릉 경내 물억새 보식지 (2025.10.23 구리 동구릉)


청량한 날씨에 산보를 즐기며 건원릉에 도착하니 멀리서 봐도 능에는 억새가 수북이 자라고 있었다. 정자각 뒷편에서 왕릉을 올려다보며 사진 몇 장을 찍었다. 봉분 가까이 가서 억새를 자세히 관찰하고 싶었으나, 출입금지 팻말에 가로막혔다. 아쉬움에 왕릉 아래를 서성이다가 봉분 우측 아래에 억새밭이 보이기에 가 보았다. 그런데 그 억새 밭 속에는‘건원릉健元陵 억새 재배지栽培地’라는 팻말이 있지 않은가? 덕분에 직접 봉분까지 가보지 않고도 건원릉에 심어진 억새가 무엇인지 코앞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리 저리 요모 조모 따져보아도 억새(Miscanthus sinensis)의 형제 격인 ‘물억새’였다. 은빛으로 빛나는 이삭에는 날카로운 까락이 보이지 않고 손으로 더듬으니 솜털처럼 부드러웠다. 드디어 우리말 고어 ‘달’을 뜻하는 ‘완薍’이 물억새임을 보여주는 현장을 만난 것이다. 더구나 그 팻말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문이 기록되어 있음에랴!


건원릉 사초 보식지에 심어진 까락이 없는 부드러운 물억새 꽃 (2025.10.23 구리 동구릉)


“이곳은 건원릉 능침에 억새를 보식(補植 보충하여 심음) 하기 위해 조성된 '건원릉 억새 재배지'입니다. 건원릉은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억새로 덮여 있는데, 이는 태조(太祖)의 유교(遺敎)에 따라 고향인 함흥(咸興)의 억새(靑薍, 인조실록에 '청완'이라 기록됨)로 조성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건원릉 억새를 보존하기 위해 건원릉 능침 억새 씨앗을 발아(發芽 씨앗에서 싹이 틈)시켜 2011년부터 기르고 있으며, 전통에 따라 1년에 한 번 한식(寒食)날 억새를 자른 후 보식이 필요한 자리에 이곳의 억새를 가져다 심고 있습니다. “**


(좌) 건원릉 봉분 모습과, (우) 봉분에서 채취하여 발아한 물억새 밭 표지판 (2025.10.23 구리 동구릉)




청명한 가을 날씨에 좋은 친구와 산보하는 즐거움에 더해, 오늘 나는 식물애호가로서 ‘달 완薍’이 물억새임을 확인하는 큰 기쁨을 누렸다.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표제어 ‘난렴(薍簾)’에 대해 “달뿌리풀을 엮어 만든 발”이라고 설명하고 ‘달발’과 같은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물억새인 ‘달’을 ‘달뿌리풀’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달뿌리풀은 학명이 Phragmites japonicus 로, 갈대와 같은 속 식물이므로, 억새 류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식물이다. 물억새를 뜻했던 ‘달’이 달뿌리풀을 가리키는 말로 바뀐 것인데, 옛말에 관심있는 국어학자들이 검토해주면 좋겠다. (끝)


* 健元陵莎草 無修改之時 …. 太祖遺敎以北道靑薍爲莎草 故至今莎草甚茂 異於他陵 - 仁祖實錄

** 팻말에는 다음과 같은 ‘건원릉 억새 관련 기록’이 부기되어 있다. (1) 「인조실록』 권20, 7년(1629년) 3월 을해(19일) - 원래 태조의 유교에 따라 북도(北道, 함경북도)의 청완(靑薍, 억새)를 사초로 썼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다른 능과는 달리 사초가 매우 무성하였다. (원문) 太祖遺教以北道青薍爲莎草 故至今莎草甚茂. (2) 건원릉지 능상사초편(1631년) - 옛날 봉릉을 할 때 함흥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전하기로는 태조의 유명이라고 한다. 한식 때 으레 잎을 베면 여름에 새싹이 돋아 자라나서 가을에 결실을 맺으며 서리가 내리면 시들었다. (원문) 古稱封陵時 自咸興移來 諺傳 太祖遺命云 美食例刈莖葉 夏時新芽茁長 至秋結實 霜落始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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