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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bcd Aug 29. 2021

커피가 쓰지 않다 느껴지면

어른이 된 걸까, 허세가 는 걸까




어느덧 커피 중독자가 되기까지


"인생의  맛을 알게 될수록 커피도  써진대". 

카페에 가면 늘 달디 단 캬라멜 마끼아또만 찾던 스무 살. 대학 친구들과 어디선가 듣고 온 우스갯소리를 나눴다. 그 기준 대로라면 인생의 쓴 맛을 조금 더 미리 맛보았을 일부 친구들은 그때도 유치한 캬라멜 마끼아또나 바닐라 라떼 대신, 멋있게 아메리카노를 마시고는 했다. 당시에 나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쓴 걸 도대체 왜 먹지? 허세 아냐?'.


그러고는 약 10년이 지났다. 그새 진짜로 더 녹록지만은 않은 학교 밖 사회생활을 경험하며, 나도 어느새 그 쓴 것에 중독된 어른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아침에 일어나 한 잔, 출근해서 한 잔, 점심 먹고 회사 동료와 한 잔. 또 늦은 오후에 한 잔, 가끔은 다저녁에 자기 전에도 한 잔. 불행인지 감사할 일인지 5분 전 카페인을 흡수해도 바로 잠에 드는 능력을 갖춘 나는, 가끔은 하루 시작과 끝을 커피로 장식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요즘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지나친것 같아 의식적으로 줄이려는 중이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언제부터 커피가 쓰지 않아 졌을까.

사람들이 보통 나처럼 아메리카노까지 이르는데 거치는 루트가 있다고 한다. 처음 시작은 달달함의 최고봉 '캬라멜 마끼아또' 그리고 '카페 모카'에서, 조금 덜 단 '바닐라 라떼'로. 그리고 '카푸치노' 혹은 '카페라떼'로. 그러다가 '아메리카노'로. 거기에 더해 샷 추가를 하거나, '에스프레소'까지 넘어가기도 한다. 커피에 대해 해박한 지식까지는 없지만, 나를 보면 맞는 것 같다. 그 트랙 상에서 나는 어느덧 아메리카노를 넘어 "더 쓴 것.. 좀 더 쓴 것..!"을 찾는 단계에 까지 이른 듯하다.




No 아메리카노. 에스프레소 please?


예전에는 회사 오피스 1층에 일리(illy) 카페가 있었다. 유럽계 회사인 우리 회사는 주로 유럽 출신 임원들이 그 카페를 그렇게나 찾았다. 그리고 꼭 에스프레소를 시켰다. 나와 다른 직원들은 주변 카페보다 좀 비싸기도 하고, 그 당시 특별한 맛을 잘 모르겠어서 자주 찾지는 않았던 카페였다. 한 번은 그 임원 분들과 점심 후 카페에 간 적이 있었는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분들이 먹는 걸 처음 따라 마셔본 게 에스프레소였다.


소주잔 같은 째끄만 잔에 나온 쓰디쓴 커피. 슬슬 아메리카노에는 익숙해졌지만, 에스프레소까지는 지나친 시절이었다. 호록- 겨우 한 모금 맛보고는, 바로 설탕을 한 스푼 가득 넣어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땐 외국인 임원이 시키니 있어 보이지만, 역시 내가 시켜 먹기엔 좀 허세 같다고 생각했다.


에스프레소는 이탈리아어로 "빠르다"라는 의미를 가졌다고 한다 (의미만 따지자면 빠름의 민족 한국인들과 더 잘 어울리는 건 에스프레소 같지만). 말 그대로 커피콩을 가루로 분쇄해서, 압축물에 고온의 물을 빠르게 투과시킨 것이란다.


그 에스프레소가 미국에서 다시 변형해 태어난 것이 이름 그대로 아메리카노. 연하고 부드러운 드립식 커피에 익숙한 미국인들이 주로 마시는 커피란다. 우리나라는 미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아 아메리카노를 즐긴다. 이탈리아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상상해보건대 에스프레소를 마셔오던 유럽인들에게 아메리카노는 정말 ‘한강 커피’ 같을 것이다.




'캬라멜 마끼아또' 같은 맛


아무튼 굉장히 오랜만에 그 일리 카페를 다시 만났다. 호캉스를 떠나온 호텔 로비 한 편에 고급스럽게 자리하고 있던 일리 카페. 하루에 아메리카노 다섯 잔까지도 마시고, 네스프레소 까만 캡슐 (제일 씀)까지 손을 뻗치는 요즘의 나는 어떨까. 그 에스프레소가 이제 더 이상 쓰지 않다 느껴질까.


소꿉놀이 하듯 귀여운 찻잔에 나온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들이켜본다. 정말이다, 쓰지 않다. 정확히 말하자면 혀에 쓴 맛이 느껴지지만, 쓰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농축된 카페인이 묵직하고 깊게 목울대를 지나 몸속을 채우는 느낌이다. '아, 이래서 유럽인들이 에스프레소를 마시는가?' 갑자기 늘 마시던 아메리카노가 배만 불리는 밍밍한 물 탄 커피 같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나의 혀가 나도 모르는 새에 단련이 된 걸까. 쓴 맛을 즐기게 된 건지, 아니면 그저 무감각해진 건지.


 가지 확실한 , 내가 인생의  맛을 봐서  커피가 쓰지 않게 느껴지는  아닌  같다. 객관적으로 난 그렇게 인생에 쓰디쓴 일도 없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 것 아닌 작은 것들에도 세상이 쓴, 캬라멜 마끼아또 수준의 어린이 멘탈이다. 그냥 어느덧 아메리카노를 넘어서 에스프레소를 즐길 수 있을 정도로 나의 입맛도 취향도 변해가는 거구나 느낄 뿐이다.


지금 내가 좋고 싫은 것들이, 5년 뒤 10년 뒤에는 아닐 수 있다는 걸 조금씩 더 깨닫는 중이랄까. 입에도 안 대던 나물이나 가지 요리, 우렁쌈밥과 같은 어른 음식으로 여겼던 것들의 맛을 조금은 알아가는 것처럼.


이대로 에스프레소에 좀 더 빠져들 수도, 아니면 반대로 다시 캬라멜 마끼아또 입맛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 여전히 다방커피를 즐겨 찾는 어르신들처럼 말이다.


대신 바랄 뿐이다. 에스프레소가 다시 쓰게 느껴져도 좋으니, 인생이 더 쓰다 느껴지는 경험을 할 일은 많이 없었으면. 내 인생은 그냥 평생 캬라멜 마끼아또 맛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인생이 써야 커피가 덜 쓰게 느껴진다는 말은 왠지 무섭다. 금세 빈 에스프레소 잔을 바라보며, 나이만 조금 더 먹은 커피 중독자의 철없는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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