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하는 짓이 붕어빵인 딸의 일기
한 때 페이스북 글 하나가 많은 사람들의 좋아요를 받고 공유된 적이 있다. 나를 비롯한 수많은 직장인들이 그 글에 무릎을 탁 치며 공감했다. 어느덧 어른으로 자라나 직장인이 된, 한 글쓴이의 덤덤한 깨달음. 어릴 적 아버지가 퇴근길에 우리가 좋아하는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사 오시던 그날은, 아마도 다른 날 보다 조금 더 힘든 하루를 보낸 날이었음을.
어느 날 문득 똑같이 그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붕어빵이며 호두과자며, 퇴근하는 길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저녁이 있었다. 집에 있을 엄마와 동생을 생각하며 나도 모르게 3천 원, 5천 원어치씩 사곤 했다. 아빠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어딘가에 힘들다, 지친다고 말하고 싶던 그날에 아빠도 그랬을까. 대신 나와 내 동생 얼굴을 떠올리며 그렇게 아이스크림을 사 왔을까.
사람은 참 이기적 이게도 내가 힘들어봐야 남이 힘든 걸 안다. 아빠를 위한 헌정 글이라며 쓰고 있지만, 어쩌면 이 글은 내가 째끔 힘들어봤다고 이제야 아빠를 쫌 더 이해한다며 쓰는 철없는 일기에 가깝다. 감당 안 되는 큰 우울감과 불안함, 무기력함이 나를 덮쳤던 지난달. 아무 데도 이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없다고 느끼던 어떤 저녁에 문득 아빠 생각이 났다.
나는 아빠를 많이 닮았다. 외모보다도 '하는 짓'을 그렇게 닮았다고 한다. 가끔 나는 인지하지 못하는데 엄마가 나를 가만히 보며 말한다. "참, 네 아빠 딸 아니랄까봐 하는 행동이 똑같다" (보통은 그게 썩 좋지 않은 행동일 때라, 아빠와 나는 그 소리를 듣기 싫어한다고 한다 ㅎㅎ). 아빠는 닮지 않았으면 하는 본인의 단점마저 빼다 박은 나를 보며, 신기해하면서도 안타까워하셨다.
힘들다고 느끼던 그날, 나는 내가 똑 닮은 아빠 생각이 났다. 아빠는 이렇게 힘들 때마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지금도 그러시진 않을까. 내가 닮은 아빠도 본인 이야기를 어딘가에 털어놓지도 못하고 늘 끙끙 참았을 텐데.
나야 그래도 '정 못 참겠으면 걍 때려치워도 죽진 않겠지' 하는 아직 무책임한 싱글이다. 가장인 아빠는 얼마나 더 무거웠을까 생각해본다. 퇴근길, 힘든 현실에서 도피해보고자 '우리집 토끼들'을 위한 아이스크림을 대신 샀을 젊은 시절 아빠가 아렸다.
올여름, 코로나 때문에 아주 오랜만에 귀국하신 아빠와 꽤 많은 대화를 했다. 회사 일로 극도로 예민했던, 힘듬의 최고점을 찍고 난 후의 어떤 금요일 저녁. 아빠는 금요일 버프로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져 보이는 나를 눈치채셨나 보다. 조심스럽게 '뭐가 나를 그렇게 힘들게 하는지' 물으셨다. 처음엔 "그냥~" 하며 표면적인 대답을 내뱉었다. 그러다가 결국 그날 나는 아빠와 새벽 한 시가 넘어가도록 이야기 꽃을 피웠다.
내 이야기를 가만히 공감하며 들어주시던 아빠는, 내가 생각해도 정말 비슷한 젊은 시절 아빠의 회사 생활 이야기를 해주셨다. 이야기 속에 아빠의 사고와 행동 패턴에 200프로 공감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었다.
아빠는 회사 일로 심지어 자살을 생각해본 적도 있다고 했다. 예전에 한번 언급하신 걸 들은 적 있었으나, 다시 들어도 새삼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출근길 차 안에서 차라리 이대로 교통사고가 나서 누워있었으면 하는 마음에, 눈 꽉 감고 미친 속도로 도심을 달려도 보았지만 사고는 개뿔. 아프기도 개뿔. 지금 와 생각해보면 도대체 회사일이 뭐라고 그랬는지 모르겠다며, 농담처럼 그날 이야기를 하는 아빠가 낯설었다. 나는 생각보다도 아빠에 대해서 잘 몰랐구나. 나는 나만 자라느냐고 바빠서, 그동안의 아빠 이야기는 전혀 모르고 살았구나.
아빠는 본인이 힘든 건 잘 얘기하지 않는 늘 '의젓한' 막내아들이었다고 했다. 바쁘게 회사 일을 하면서도 틈만 나면 주말마다 내려가 일을 도왔던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서, 한 번도 본인 힘들다고 말해본 적은 없다 했다. 그러던 아빠가 자살 충동이 들 만큼 힘들었던 어느 날, 마음 졸임과 피로함이 숨겨지지 않아 회색빛 안색으로 티가 나던 그날. 아빠의 누나인 고모가 알아채셨나 보다.
신실한 기독교인이신 고모는 그러고 얼마 후, 한 권사님과 우리 집을 찾으셨다. 평생 무교로 살았던 아빠와 엄마. 아무리 나 잘되라고 해주시는 것이라도 하느님도, 기도문도 다 낯설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던 그때는, 그 권사님이 해주신 위로의 말과 어깨 토닥임이 그렇게나 도움이 됐더라고 했다.
그때가 내가 초등학교 2학년쯤 되었을 때였을까? 당시 우리 가족이 살던 아파트는 꽤나 울창한 산을 뒤편에 품은, 이른바 '산품아' 였다. 여름날, 복도로 나오면 높게 자란 아카시아 나무들이 초록색 잎새와 은은한 향기로 눈과 코를 꽉 메우곤 했다.
아빠는 그날을 회상하며 말씀하셨다.
“그날, 그 권사님이 기도를 마치고 우리 집을 나서면서 복도 너머 아카시아 나무들을 보면서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
‘XX 씨, 아카시아 꽃이 너무 아름답게 폈네요. 참 너무 살기 좋은 아파트예요' 하고.
그러고는 그러더라.
‘꽃 핀 것 아셨어요? 바쁘지만 한 번씩 이렇게 예쁜 꽃이랑 나무도 보면서 살아요 우리' 하고."
그때 아빠는 그 말을 들은 후에야 코 앞의 아카시아 나무에 핀 꽃이 보였다고 했다.
아마도 그때 아빠는 그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 편을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했을 것이다. 내심 '기도가 실질적으로 해결에 얼마나 도움이 돼' 했었어도 말이다. 결국 내가 해결할 일이라는 생각에, 걱정할 엄마에겐 속마음 깊이 다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힘듬에 파묻혀 시야가 좁아지고 온통 어두워졌을 때, 눈앞의 아카시아 꽃을 가리켜 준 그분이 그렇게 고마웠을 것이다.
그래, 그거면 되는 걸 텐데.
묘하게도 그날 아빠와의 대화가 나에게 참 많은 위로가 됐다. 나와 똑같이 닮은 사람이, 먼저 똑같은 상황들을 경험해보고 해주는 이야기가 생각보다도 더 큰 힘으로 다가왔다. 돈 주고 심리상담받는 것보다 몇 배나 힘이 셌다. 이렇게 대화할 수 있는 아빠를 둔 나는 참 복이 많다 생각했다.
그러다가 다시 아빠를 생각했다. 아빠는 그럼 지금은 괜찮을까. 본인 힘들어도 딸 얘기 들어주고, 아들 챙기느라 본인은 그 앞에서 힘든 내색 할 수 없을 아빠. 나도 20대 때보다야 30대에 들어선 지금 훨씬 단단해진 것은 맞지만, 서른 살이라고 이제 세상이 껌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아빠도 그럴 것이다. 나보다 삼십 년 더 묵은 세월이지만, 여전히 힘든 일은 힘들 것이다.
아빠는 괜찮냐고, 되묻지 못했던 그날 밤의 대화가 마음 한 구석에 계속 남았다.
어렸을 적 나는 아빠가 괜히 무섭고, 조금은 어색했다. 예닐곱 살쯤 됐었을 때인가. 엄마와 동생 없이 아빠와 단 둘이 어딘가를 차 타고 가던 그날, 안 그래도 말이 없는 편이었던 나는 '가는 동안 아빠랑 무슨 말을 하지' 하고 혼자 걱정했던 기억이 난다.
다 자라난 나는 여전히 말수가 적은 편이다. 그러나 나는 아빠와의 대화가 더 이상 어색하지 않다. 아니, 해가 갈수록 아빠와의 대화에서 나는 매번 놀라곤 한다. 아빠랑 얘기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해답을 찾기도 하고, 혜안을 얻기도 한다. 여전히 풍부하지만은 못한, 조금은 어쩔 수 없는 K-아버지식 애정표현이지만 이젠 그 목소리에서, 눈빛에서 딸을 향한 그 마음을 또렷하게 느낀다.
진심으로 인간 대 인간으로서 아빠를 존경하기도 한다. 어느덧 삼십 대에, 직장생활도 어언 5년을 훌쩍 넘겨 해온 나지만, 아빠는 진짜 슈퍼맨 같다. 나와 대비해보면 더 그렇다. 몇 달 전 일본의 유명한 자수성가 글로벌 기업가, 이나모리 가즈오가 쓴 <왜 일하는가>라는 책을 읽었다. 뜻밖에도 나는 그 책에서 아빠를 발견했다.
삼성이 10년간 신입사원들에게 추천하고 읽도록 시킨 책이라던데. '왜 성공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겠다'싶은 저자의 인생 스토리의 많은 부분에서 아빠와 닮은 점들을 찾게 되어 놀라웠다. 그래서 동생에게도 책을 선물했다. 다 읽으면 '이 부분 진짜 아빠랑 똑같지 않냐!?' 하고 동생 어깨를 쳐대며, 공감을 나눌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한 달. 우리 가족은 아빠와 진한 늦여름 추억을 8월을 꽉 채워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끝끝내 이 마음을 아빠에게 건네지 못했다. 그 한 달 내내, 그리고 다시 해외로 가기 싫은 발걸음을 떼는 공항에서의 아빠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 순간까지도 말이다. 변명하자면 내가 전하고 싶은 마음은 훨씬 깊고 뜨거운데,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그저 얕은 몇 마디의 말이 되어 날아갈 것 같았다. 그래서 그나마 말보다는 글이 편한 나는, 아빠 헌정 글을 이렇게 아빠 몰래 쓴다.
아빠가 이 글을 봤으면 싶기도 하고, 보지 못했으면 싶기도 하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혼자 털어놓고 말 것이 아니라, 하루라도 빨리 그 상대방에게 가 닿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영, 그 마음을 놓침 없이 담기에는 아직 내 글솜씨가 모자라다 느낀다.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이렇게 내 생각의 적나라한 민낯을 드러내는 게 어색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이 글을, 늦지 않게 아빠에게 보여드리고 싶다. 나중에 커서 효도할게요 라던지, 늘 아빠를 존경합니다 라던지 하는. 어릴 적 자주 쓰던 다소 뻔한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그 편지 속의 말들보다는 이 일기에 아빠에 대한 나의 마음이 조금은 더 잘 담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도 아빠가 힘든 날 어깨를 토닥여줄 수 있는, 아빠가 못 볼 때 아카시아 꽃이 예쁘게 폈다고 알려 줄 수 있는, 아빠의 딸이자 좋은 친구로 나이 먹어 갈 수 있기를 바래본다.
(아빠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