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의 증명을 읽고
장례는 죽은 이를 잘 보내주는 동시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위로하는 과정이다. 이모와 구의 죽음 앞에 담은 혼자였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에게 서로뿐이었으므로,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자신의 존재를 기억하는 유일한 존재일 구의 죽음은 담에게 곧 자신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구를 먹어 기억하겠다는, 영원히 나와 함께 살아남게 하겠다는 담이 혼자 치르는 처절한 장례는 적어도 이 소설 안에서는 설득력을 가진다. 구의 증명은 곧 담의 증명이니까.
그럼에도 나는 구와 담의 절절한 사랑에 공감하기보다는 구의 미숙한 사랑에 속이 터지는 쪽이다. 이모의 사랑과 함께였던 담과 달리, 부모가 있었음에도 그 무엇의 사랑도 온전히 느낄 수 없었던 구로써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책을 읽는 동안엔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제 보니 구의 사랑을 미성숙하다 꾸짖기에 구가 참 어리다. 이제 겨우 첫사랑을 했을 뿐이구나.
살아남겠다는, 살아서 구를 기억하겠다는 담의 마음이 이랬을까 싶어 책을 읽으며 생각난 시와 그에 대한 평론가의 글을 덧붙인다.
사랑의 발명
이영광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Amo : Volo Ut Sis’
사랑합니다. 당신이 존재하기를 원합니다.
세상이 고통이어도 함께 살아내자고, 서로를 살게 하는 것이 사랑이 아는 유일한 가치라고 말하는 네 개의 단어. 사랑은 당신이 이 세상에 살아있기를 원하는 단순하고 명확한 갈망이다.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당신은 죽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문장은 뒤집어도 진실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 역시 죽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인간이 더는 못 살겠는 때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살 ’ 방법‘이 없거나 살 ’ 이유‘가 없거나. 이제 나는 어떤 불가능과 무의미에 짓밟힐지언정 너를 살게 하기 위해서라도 죽어서는 안 된다.
내가 죽으면 너도 죽으니까, 이 자살은 살인이다.
(신형철 ‘무정한 신과 사랑의 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