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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man Jan 20. 2021

은폐된 시골에서의 착취

레이먼드 윌리엄스, <시골과 도시>, 나남출판

‘시골’은 어떻게 ‘시골화’되는가? 첫 번째 ‘시골’이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시골이라면, 두 번째 ‘시골화’할 때 시골은 시골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이미지들 예컨대, 목가적인 이미지 혹은 낙후된 이미지, 자연 등  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이때 ‘시골’ 자리에 지방, 농촌 등의 단어를 대체해도 의미상 달라지는 것은 없겠다. 이러한 단어들은 ‘도시’와 짝을 이루어, 도시와 시골은 대비되는 형상을 지닌다. 대학교 수업에서 새마을운동을 강의하다가 교수님이 소개해주어 알게 된 이 책을 읽기로 한 이유는 바로 이 ‘도시’와 ‘시골’을 ‘도시화’하고 ‘시골화’하는 매커니즘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 책은 시골화의 매커니즘보다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던 ‘농촌에서의 억압과 착취’에 초점을 맞추고, 영국의 문학 작품으로 분석 대상을 한정해 이 ‘억압 착취’의 관계와 구조가 문학 속에서 어떻게 은폐되었는지를 다룬다. 그러나 영국 문학이라면, 존 밀턴, 셰익스피어, 찰스 디킨스, C.S.루이스밖에 모르는 나에게는(그마저도 찰스 디킨스는 단 한 권도 읽은 적이 없다), 생소한 영국의 농촌 문학들을 끊임없이 인용하며 논지를 전개해가는 서술 방식이 매우 어렵게 느껴졌다. 꾸역꾸역 중간까지만 읽고 결국 포기하였다. 그러다 보니 머리에 남는 내용도 많지 않았다. 이 책 자체가 어느 정도 영국 문학에 대한 선지식이 있는 상태에서 읽어야 좀 수월하게 읽힐 듯하다.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베르길리우스나 헤시오도스 같은 고대 저자의 작품부터 비교적 현대의 문학에서도 도시에 대해서는 “학문, 소통, 빛 등이 존재하는 인간 업적의 중심”, 그리고 “소음, 세속성, 야심의 장소”라는 전형적인 관념이 형성되는 반면에, 시골에 대해서는 “이상화나 신비화”가 나타남을 발견한다. 즉, 시골은 역사적으로 문학에서 도시가 잃어버린 지향, 이상적인 공동체로 그려졌다. 그런데 동시에 시골은 도시와 대비되어 낙후성, 후진성, 무기력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다.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실제 역사와 농촌 문학을 분석하여 이상적인 지향으로서의 시골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문학 작품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서 자행되던 농촌 착취를 발견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거기에 그치지 않고, 각각의 시대마다 다른 역사적 콘텍스트에 의해 농촌의 현실이 가려졌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17세기 대표적인 장원시인 벤 존슨의 <펜즈허스트 To Penshurst>는 시인이 농촌에서 벌어지는 착취를 어떻게 눈 감는지 보여준다. 시인을 환대해주는 주인과 농촌의 질서를 찬양하는 이 시는 “노동의 저주를 제거하고, 자연의 은혜와 자발적 자선을 주술적으로 재창조”한다. 그 시에서는 농촌 노동자는 보이지 않고, 마법처럼 풍족하게 음식을 내오는 주인의 자선과 자비만이 존재한다.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이를 더욱 냉철하지만 분노가 서린 어조로 이렇게 얘기한다.      


“소비의 자선을 습관적으로 입에 올리게 되면서, 생산의 자선은 무시되고 은폐되었으며, 때로는 억압되었다. 소비의 자선이 노동 사회에 일반적으로 적용될 때, 노동 사회의 실상은 신비화될 수밖에 없었다. 노동 현장에서 어떤 가혹행위를 하더라도 노동이 끝난 뒤 잔치판이라는 자선을 베풀면 다 해결된다고 쉽게 생각해 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존슨은 온갖 수사를 동원해가며 시골의 현실을 은폐하고자 한 것이었을까? 윌리엄스에 의하면, 저택의 객으로서 대접받고 있다는 시인의 입장 때문이다. 따라서 존슨은 이 저택을 과거에 영국에 존재했던 “책임과 환대의 자선”이 남아있는 지역으로 묘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환대의 자선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생산의 자선, 즉 농민의 노동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인의 시선은 “펜즈허스트의 들판에서 노동을 보지 않고 저절로 곡식을 생산하는 토지”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농촌 착취는 바로 소위 농촌 근대화 운동이라는 ‘새마을운동’일 것이다. 박정희 정부는 농촌 사회의 저발전은 ‘게으른’ 농민들의 탓으로 돌리며, ‘낙후된 농촌’과 ‘발전된 도시’의 대비라는 레토릭을 구사하였다. 박근혜 정부는 이 새마을운동을 세네갈에 수출하면서 똑같은 레토릭을 토씨 하나 빠짐없이 그대로 반복하였다. 세네갈 새마을운동을 소개하는 뉴스에서, 한 세네갈 청년이 ‘나는 지금까지 무기력하게 게으르고 노름에 빠져 지냈는데, 이렇게 나와서 어떤 일을 하니 보람차다’는 뉘앙스의 인터뷰를 한 것이 기억난다. 박정희 신화 만들기에 동원되는 새마을운동은, 도시의 일방적인 농촌 규정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이다. 그것은 농촌 근대화라기보다는 농촌 예속화였다. 현재에도 도시에 의한 시골 착취는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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