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분당의 프레임에서 리더십을 생각하다
저자는 <대동법>(역사비평사)을 저술하였는데, 누군가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라는 제목으로 그 책의 서평을 남겼다. 똑같은 제목을 사용한 이 책은, 그 서평의 질문에 대한 고민과 저자가 내린 결론이 담겨 있다. 책의 내용과 관련해 제목의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덧붙이자면, 왜 선한 정치를 펴도록 교육받은 지식인이 기축옥사 같은 “거대한 파국”을 맞이했는가, 일 것이다.
이 책은 선조 8년~23년까지의 15년 동안에 벌어진 동서분당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이 시기는 더욱 조명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대단히 ‘조선다운’ 정치적 갈등의 양상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조선 시대에서 가장 “정치에서 이상이 드높이 외쳐진 시대”였음에도 사림의 정치적 이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저자는 이 시기를 “권력현상의 관점”에서 접근하며, 정치적 행위자들의 정확한 정치적 입장과 그것의 객관적 의미를 파헤친다. 저자의 이러한 방법론은 비단 조선시대 당쟁사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국의 정치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림은 연산군 대부터 명종 대까지 약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4번의 사화를 받는 등 정치적 탄압을 견디어 왔다. 특히 기묘사화(1519)에서 선조가 즉위할 때까지(1567) 약 50년이라는 탄압의 시간과 기억은 선조 대 당쟁의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인물들의 삶과 사고를 지배하였고, 그것이 정치에도 반영되었다.
명종 대 정치는 외척과 훈구 세력이 기승을 부렸던 파행적 정치를 보여주었기에, 선조가 즉위하면서 떠오른 정치적 과제도 자연스레 “구체제의 유산을 청산하는 문제”였다. 신진사림에게 구체제 청산이란, 훈척 세력과 외척 세력의 청산을 의미하였다.
교과서에서는 동서분당에 대해 이조 전랑 자리를 놓고 벌인 심의겸을 비롯한 서인과 김효원을 필두로 하는 동인 사이의 정치적 대립이 격화되어 발생한 것으로 배운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정치적 입장을 반영하지 않은 매우 피상적인 설명이다. 심의겸은 선조 초기 수렴청정을 하였던 인순왕후의 남동생, 다시 말해 외척 세력이었다. 따라서 동인에게는 심의겸과 그와 관계를 유지하는 서인 그룹은 용납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사실 선배사류였던 서인은 “사화를 미연에 막고 신진사류의 대표적 인물들을 보호한 공이” 있는 심의겸과의 관계를 쉽사리 끊을 수 없었던 것이지만, 후배사류는 이를 이해할만한 여유나 식견이 없었던 듯하다.
심의겸과 김효원의 갈등은 동서분열의 원인으로 볼 수는 없지만, “사림분열의 한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갈등이 개인적 수준을 넘어 사림 간 집단주의적 갈등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분열의 기저에는 역사적 경험에서 누적된 구세력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그에 대비되는 자신들에 대한 도덕적 확신이 존재했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언관직을 차지하면서 오랫동안 부패한 “훈척에 대한 도덕적 비판자의 역할”을 해왔던 신진사림들은 자신들의 도덕적 정당성과 정치적 주도권을 확신하였다.
언관은 오늘날로 따지면, 비판적 민간 언론에 해당하는 관직으로, 그 본질적 기능은 “비관료적 기능으로 관료조직의 건전성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언관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국정 현안에 대한 해결 능력이 아니라 비관료성과 부패 방지였다. 국정 현안 해결은 대신에게 필요한 능력이었다. 그러나 신진 사림이 목격해왔던 대신은 부패만 일삼는 훈척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대신의 권한과 역할을 부정하고 공론을 자신들만이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었을 것이다. 이는 선도 대 대신의 권위와 권한 약화라는 결과로 이어진다.
동서분당을 이해할 때 핵심적 사안은 사림을 제어할만한 합리적이고 권위 있는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였다. 이 시기는 언관의 권한이 강한 대신 대신들의 권한은 매우 취약하였던 시기였다. 선조 대 사림들은 부도덕한 이전 시대 조정에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여 존경을 받는 대신을 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대신을 배제하고 정치적 주도권과 공론을 배타적으로 독점하고자 하였다. 이는 정치적 욕망의 한 형태로 볼 수 있으나, 더 근본적으로는 역사적 경험이 바탕이 된 도덕적 확신에서 나온 행위였다.
이이가 주장한 개혁의 핵심도 동서 사림을 통합하는 한편 약해진 대신권을 강화하는 것이었으나, 대신권의 강화는, 공론을 유일하게 주도할 정치적 주체로서의 자격을 진심으로 믿었던 삼사에게는 이전 시대로의 회귀와 이이 당파의 조정 진출을 의미했기에 이이는 격렬한 반대에 직면했다.
당쟁이 더욱 격화되면서, 동인은 서인과의 갈등을 ‘옳고 그름’의 문제로 바라보았고, 이는 곧 이들이 한 세력은 제거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음을 의미했다. 이것이 그들의 프레임이었고, 그들이 인식한 조정의 현실이었다. 대표적인 동인이었던 김우옹은 “당시 조정의 정치세력을 선과 악의 구도로 구획했다.” 다른 동인들도 “당시를 심의겸이 주도하는 외척의 전횡이 계속된 시기로 보았다.” 류성룡마저도 “개혁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이 일을 이이와 함께 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서인이라고 달랐던 것은 아니었다.
정여립의 모반 사건으로 촉발된 기축옥사는 선조 8년부터 이어진 사림 세력의 분열 양상이 더 극단적으로 반복된 사건이었다. 기축옥사 심문 과정에서 서인 정철은 동인에게 노골적인 적의감을 드러냈고, 피해자였던 동인 측도 정철을 포함하여 이미 한참 전에 사망한 이이에 대해서도 대단한 적대감을 보였다.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된 기축옥사를 통제할 수 있던 인물은 당시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던 선조뿐이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사림의 갈등은 역사적 요인과 당시 정치 구조적 요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한 정치 현상이었다. 과거의 경험에서 이들은 도덕적 정당성에 갇히어 분열했고 “그것보다 더 강력했던 권력에 대한 욕망의 자장으로 빨려들고 마침내 함몰되었다.” 자신의 정치를 하려던 선조는 이들의 분열을 자신의 왕권 강화에 이용하였고, 그로써 독재에 가까운 권력을 행사하였다. 이는 사림 그 누구도 원하던 결과가 아니었다.
이 시기 정치 행위자들에게 공통으로 부족했던 것은 “사회적 결과에 대한 책임”, 즉 정치적 책임에 대한 의식이었다. 그나마 이이를 제외한 모든 사림은 개인적 혹은 당파적 신념에 대해서만 책임을 졌을 뿐, 실제 사회적 결과에 책임을 지는 데에는 실패했으며, 선조는 정치적 책임을 지는 대신 그것을 사림들에게 떠맡기고 자신의 왕권 강화에만 집중하였다. 명종 대에서 선조 대로의 이동은 사림의 역할 변화이기도 했다. 그들은 이제 단순한 도덕적 비판자가 아니라 국정과 민생을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이를 알았던 인물은 이이밖에 없었다. 정치가 “민생개혁에 대한 추구”가 아니라 “정치세력 간의 시비”로 격화될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이 책은 보여준다.